한의사와 공무원 이야기
중학교 때 나는 별난 취미가 있었다. 좀 친하다 싶으면 그네 집을 가보아야 했다. 읍내 아이들은 어떻게 사는지가 몹시 궁금했다. 친구 집에 가면 식구들과 밥도 같이 먹고 친구 방에서 잠도 잤다. 부모님은 아들 친구라고 친절하게 잘해주셨다. 우리 집처럼 텃밭도, 사랑방도 없고, 마당도 넓진 않았지만 깨끗하고 편했다.
그 친구들을 우리 집에도 초대했다. 할아버지와 같이 지내는 사랑방에서 하룻밤씩을 묵었다. 아마도 사랑방이 담배 냄새에 소죽 끓이는 향까지 많이 불편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친구들을 보면 신기한 듯 이것저것을 물어보셨다. 누구에게나 성과 이름을 알아본 다음 본관이 어디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본관 이란 용어를 잘 몰랐고, 조상(시조)의 태어난 곳을 아는 친구는 없었던 거 같다. 답변을 못한 것에 창피해하였고 나는 미안했다. 친구들은 나중에 부모님에게 본관을 알아내고 나에게 알려주는 아이도 있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친구들은 본관에 얽힌 추억을 더듬으며 할아버지 안부를 물었다.
2011년 공무원 퇴직 후에 해외 근무를 계속하였다. 2019년까지 임부를 마치고 쉬는 시간을 보내는데, 2020년 봄 코로나-19라는 신종 감염 병이 발생했다. 바깥활동에 제약을 받을 뿐 아니라 해외 출장 길도 막혔다. 사람을 멀리해야 하는 세상이 돼 버렸으니 집에서 마누라와 TV만 보았다. 나이 들면 외로움과 싸움이 힘들다고 했다는데 내가 바로 그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동안 미뤄두었던, 하고 싶은 일이 많은데, 망에 갇힌 새 신세가 되었다. 그동안 소식을 모르던 친구들을 찾아보고 싶지만 선뜻 나서기도 망설여졌다.
얼마 전 고향 후배로부터 뜻밖에 전화가 왔다. 나의 중학교 친구가 연락처를 알고 싶다는 거였다. 반가웠다. 소식이 끈긴지 오래됐지만 가슴속엔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던 친구였다. 며칠 후 전화가 연결되었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서로는 단박에 알아차렸고, 어려서부터 사귄 불알친구라도 만난 듯 격 없이 떠들며 웃어 댔다. 경상도 어느 도시에서 한의원으로 성공한 친구였다. 중학교 때 우리 집에 왔었고 나도 친구네 집에 갔었다. 친구 아버지는 남원 시내에서 약국을 하셨고 어머니는 멋지신 데다 집도 현대식 건물이었다. 먼저 나를 찾아준 친구가 고마웠고, 그러질 못했던 나를 자책하였다.
중학교 때 우리는 노래를 좋아하여 가수를 꿈꾸었다. 그러나 그는 한의사가 되었고, 나는 공무원이 되어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 반세기 동안 헤어졌던 친구를 만난 것이, 또한 앞으로 계속해서 만나자고 약속한 것이 우리를 설레게 했다. 우리는 지난 세월 동안 삶의 여정을 상세하게 나눌 것이다. 서로를 존중하면서 여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도 얘기할 것이다. 50년 만에 만난 친구가 곁에 있게 되었으니 나는 행복하다.
깨복쟁이 초등학교 친구, 철들어가던 중학생 친구, 다 커버린 고등학교 친구들, 소식은 몰라도 생각나는 친구들이 많다. 잘 나가는 친구가 먼저 연락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르면 바로 튀어나와 소주 한 잔에 반말로 음담패설 깔깔대는 친구는 언제나 좋다. 진정한 친구는 ‘어려울 때 나타나 주는 사람이고, 지혜를 나눌 줄 아는 사람’이라 했다. 가족끼리는 어려운 얘기도 친구한테는 털어놓을 수 있어서 좋다. 그래서 친구는 많을수록 좋다고 했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그림자 차럼 함께 할 수 있는 사이가 좋은 친구일 것이다.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한 사람이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친구"라고 말하였다. 주어진 나의 삶을 멋지게 엮어가는 지혜는 친구 간의 '우정'이다.
수필가 피천득은, ‘오래 산다는 것은 과거의 좋은 기억과 인연을 많이 가졌다는 뜻이어서 좋다’라고 하였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아름답게 늙어가는 사람은 멋이 있고 존경스럽다. 공원을 산책하며 시간에 쪼들리지 않고 하늘 위에 흘러가는 흰 구름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 좋다. 그러나 신은 이승에서의 고달픈 삶 내려놓고 편히 쉬라 하시는가, 하나씩 둘씩 데려가기 시작했으니 가는 세월이 안타깝고 야속하다.
좋은 친구는 인생에서 가장 큰 보배이자 마지막 재산이다. 나이 들면서 재산을 늘리려는 것은 욕심이다. 있는 재산이라도 잘 지켜야 한다. 지금껏 앞만 보고 달려왔다면, 이제는 천천히 좌우를 살피면서 더불어 살아가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