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노모께 세배

96세 어머니의 고향 그리움

by 노고지리

¶ 6.25 전쟁과 어머니 ¶

어머니는 일제(日帝) 강점기 시대 처녀 공출(위안부)을 피하여 17세의 어린 나이에 서둘러 혼인(婚姻) 하셨다. 지리산 줄기 오지 마을에서 아기 둘을 기르시던 1950년, 셋째 아이를 임신하셨을 때 6. 25 전쟁이 터졌다. 북에서 물밀듯이 내려온 인민군들은 불과 몇 개월 만에 부모님이 사시던 전라남도 곡성군 삼기면 밤실 마을까지 들이닥쳤다. 낮에는 무장한 군인과 순경들이 들락거렸다. 밤이면 산속에 주둔하던 인민군들이 내려와 식량을 약탈하고 어떤 집에는 불을 질렀다. 마을 내에 공직자나 지식인들은 반역자라 하여 인민재판에 넘기는 등 공포 분위기였다.


인민군은 밤마다 찾아와 아버지의 행방을 다그쳤다. 직장에서 귀가하지 않으신다고 시치미 떼는 어머니께 온갖 협박과 욕설과 구타로 임산부에게는 피 말리는 공포의 나날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쳐 집에 있던 곡식과 귀중품을 차아내려 뒤지던 중 서랍 속에서 태극기와 공을 발견하였다. “요년 봐라, 인민의 반역자 증거를 발견했다"라며 내동댕이친 공에 어머니 얼굴에 맞고 발로 차여 실신하였다. 할아버지께서는 방 한구석에 쭈그려 누어 사지를 떨면서 “아이고 나 죽겠네”라며 중 환자로 연기하셨다. 큰 형은 변이 마렵다고 화장실로 피신하는 등 지금 생각하면 실로 연극 같은 광경이 벌어졌다.


어느 날 밤에 또다시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를 데려가야 한다며 따라오라 하였다. 주변에 마을 사람들과 작은 집 식구들도 있었지만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고 공포에 떨면서 바라만 볼뿐이었다. 어머니는 ‘끌려가면 죽는다’는 걸로 알고 몸부림치며 저항하였다. 사생결단의 각오로 목 놓아 통곡하며 반항을 계속하였다. 인민군들은 힘없는 여인의 처절한 절규와 야심한 밤하늘 통곡 소리에 공포를 느꼈던지 아니면 임산부였음을 감안했든지 한동안 논의 끝에 풀어주어 구사일생이 되었다.


그날 밤 산으로 끌려가셨더라면 어머니와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나를 살리셨고 내가 어머니를 살려냈을 수도 있었다. 천지신명께 감사를 드릴뿐이다. 당시에 마을 주민의 일부는 반란군이 되어 그들의 부역에 동조하였다. 집집마다의 사정을 잘 알고 있어 평소 감정을 가졌던 사람들에게는 인민군을 앞세워 집에 불을 질러 보복을 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아버지를 데려가려 했던 것도 반란군들 중 누군가의 소행인 것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평소 온화한 성품으로 형제간에 우애하는 모범을 보여주셨다. 성실한 농사일로 수확한 곡식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드렸다. 찾아오는 걸인들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시는 선행을 베푸셨다. 주변에 인심을 잃지 않고 덕을 쌓으셨던 거 같다. 이웃집들은 거의 불에 타 없어졌지만 우리 집은 피해를 보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할아버지께서 평소 쌓으셨던 인품과 덕망에 반란군들도 해코지를 안 했던 거로 보아 하늘에 계신 할아버지께 감사드린다.


전쟁 당시 정부에서는 밤실 마을 주민들의 안전을 위하여 소개(疏開, 적의 공격으로부터 피해를 줄이고자 주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분산시킴) 하고, 소재지 마을인 ‘원 등’으로 임시 이주를 시켰다. 원 등 마을 둘레에 방어벽을 설치하고 이주한 주민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였다. 이주한 주민들은 일가친척 또는 누군가의 집에서 머물러야 했다.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마을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은 기막힌 현실을 피할 수가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둘러 살림을 옮겨야 했다.


어머니는 임신부 상태로 집을 떠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아버지께서 교육자여서인지 원 등 마을 여러 곳에서 자기네 집에서 출산하라는 친절들을 베푸셨다고 한다. 다행히도 부잣집 일가 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분만이 임박했을 무렵 그 댁에서도 출산하는 식구가 있어, ‘한집에서 두 가족의 출산은 어려우니 방을 비워달라는’ 말에 또다시 거처를 옮겨야만 했다. 어머니는 출산을 코앞에 두고 다른 집 낯선 골방에서 분만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난민이었던 어머니의 출산 이야기이다. 원 등 마을로 이주하면서까지 8개월여 임신기간 동안의 고난을 겪으며 ‘태아가 살아 있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라고 하셨다.


1951년 음력 3월 9일, 나는 곡성군 삼기면 소재지 원 등 마을에서 전쟁난민으로 태어났다. 전쟁의 공포를 뱃속에서부터 경험했으니 쉽게 놀라고, 소극적이며, 욕심 없이 양보하는 성격들이 태아기 후유증이 아닌가 생각한다. 임신부나 태아는 생사를 오가는 불안한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나를 낳으신지 두 이레(2주) 만에 몸도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밤실 본가(本家)로 다시 들어가셨다. 분만 후 산후조리가 산모에게나 신생아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남의 집에서 누가 얼마나 챙겨줬겠나. 원 등에서 밤실 까지는 반 시간을 걸어야 하는 거리인데 산후조리도 못한 채 신생아를 등에 업고 걸어오시는데 ‘발걸음을 옮기기가 매우 어려웠다’ 하셨다.


어머니는 올해 96세로 미국에 계신다. 큰 형님과 동생들이 정성을 다하여 보살펴 드려도 고국만을 그리워하신다. 말씀이나 귀나 눈도 건강하신데 기억력이 흐려지시니 안타깝다. 그 정정하시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백발노인이 되셔 세월이 원망스럽다. 살아계셔도 그리운 어머니, 사랑합니다.


워싱턴 공원의 6.25전쟁 기념비

¶ 어머니의 고향 ¶

워싱턴 외곽(外廓) 조용한 도시 애난 데일(Annandale)에

버지니아 주(州) 정부 노인 아파트가 있습니다.

나무숲에 둘러싸여 새들이 지저귀며

따스한 햇살이 온종일 놀다 가는 곳,

이곳에 어머니는 홀로 계십니다.


반백이 된 불효자식이

어머니 앞에 엎드렸습니다.

몰라보게 수척해지셨어도

들국화처럼 고운 미소는 예나 같았습니다.

허리 굽은 뒷모습은

초승달같이 외로워 보여 가슴이 아픕니다.


일제 강점기 처녀 공출 피하려고

열여덟 어린 나이에 가마 타고 오셨지요.

택촌 마을 청송 심 씨 가문에서

글 배우며 귀하게만 자라시다가

시부모님 대가족의 외며느리가 되셨습니다.

노 씨 장손 댁 안주인이 되셨지요.


그리고 6.25 전쟁을 맞아

생사를 오가는 난리를 겪으셨습니다.

밤이면 산에서 내려와 아버지 행방을 다그치던

인민군들의 협박에도 끝내 굴하지 않으셨지요

임산부로 남의 집 골방까지 피신하시며

셋째를 낳으셨습니다.


지리산 줄기 곡성에서 남원으로 피난 오셔서는

한 섬지기의 논 밭일을 다 챙기시고

5남 2녀의 자식들을 길러 내시느라

하루도 편할 날이 없으셨을 겁니다.


어깨에 짊어지신 무거운 짐,

집 안팎의 살림살이를 어떻게 감당하셨는지요.

호미 들고 밭에 가시면 해가 져야 돌아오시고,

눈 내리는 겨울날에 쌓인 세탁물

맨손으로 얼음 깨고 방망이질하셨지요


식구는 많아도 살림할 여자가 혼자뿐이여

힘들어하신 때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젊은 시절 모습은 난초처럼 날렵한 여인이셨습니다.

금방 세수한 얼굴은 8월의 풋고추 윤기가 흘렀습니다.

아버지가 사다 주신 분도, 예쁜 옷도 농속에만 두시고

찬란하게 치장하신 모습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담장 밑에 흙을 돋아 화단을 가꾸셨지요

봄이 되면 봉숭아, 채송화, 맨드라미 뿌리시고

꽃이 예쁘게 피면 아이처럼 좋아하셨지요

빨간 봉숭아 물 우리들 손톱에 들여 주시며

욕심내지 말고, 성실하게 살라 하신 고운 음성

지금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미국 이민(美國移民) 떠나시기 전(前) 부모님이

평생을 일구셨던 한 섬지기 논밭을

자식들에게 모두 넘겨주셨습니다.

모두 다 내어주시고 그것도 모자라

당신께서 드시던 “약이라도 나누어 먹자” 하셨습니다.

한없이 주기만 하시는 어머님의 사랑은 어디가 끝이신가요.


80년 전,

외아들이신 아버지와 혼인하셔

일곱 남매의 든든한 자식들과

많은 손자 손녀, 증손자들까지 자손을 번창시키셨으니

어머니는 우리 집안 일으키신

장한 어른이십니다.


구순(九旬)을 넘기도록 귀도, 눈도 아직은 밝으십니다.

무릎은 끝내 무너져 보행기에 의지하시는군요.

코로나가 없을 때는 마실도 나가셨는데,

이제 말동무는 TV 뿐이군요.

온종일 방에서 망(網)에 갇힌 새가 되셨습니다.


아버지 계실 때도 늘 고향을 그리워하셨는데

혼자되시고선 한국에 더 오고 싶어 하십니다.

큰아들이 성심으로 돌봐드려도,

큰딸이 간병사가 되어 매일 수발드렸어도,

어머니는‘고향 옛집’을 찾으십니다.

이젠 기억을 많이 잃고 계십니다.


최근 일부터 과거로 정신력이 흐려지십니다.

전화 속의 목소리는 전(前)만 못하시고

이곳 소식은 묻지도 않으십니다.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말씀뿐 이십니다.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운 어머니의 고향,

논밭 농사, 선산 관리, 눈에 밟히는 넷째 아들 소식을

늘 궁금해하셨습니다.

그렇게도 보고 싶으신 자식, 손자들,

어찌 어머니 마음을 헤아릴 수나 있겠습니까.


밤이나 낮이나 그리운 어머니의 고향

당신의 꿈속에서라도 나타나

논과 밭을 마음껏 활보(闊步) 하시며

행복해 지시기만을 오늘도 기도드릴 뿐입니다.


임인년 설날 아침 세배 올립니다. 만수무강하옵소서.

1979_주천_집_PICT0056_adjusted.jpg 어머님이 그리워하시는 고향집 겨울풍경 60년 전 모습, 안채는 지금도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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