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시도에게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아직도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하는 게 맞을까?
이런 고민을 하며 사는 걸 보게 된단다. 20대에도, 30대에도, 심지어 40대에도.
아빠가 받은 가장 큰 축복 중 하나는, 내가 좋아하고 남들보단 조금 더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 사실을 서른 살 즈음에 확신할 수 있었다는 것.
20대엔 고민이 많았던 거 같아. 의사가 되는 건 별로 관심이 없었고, 문과였으니 엔지니어가 되는 것도 안 될 일이었지. 역사를 공부할지, 경영학을 공부할지, 경제학을 공부할지 정하는 것도 그렇지만, 공부를 계속하는 게 맞는 일인지도 몰랐었어. 당시 아빠 친구들은 사시나 행시, 아니면 회계사 공부를 했던 것 같아. 취업 준비를 하거나.
이빠가 공부를 엄청 잘하진 않았었다는 걸 이야기해주고 싶구나. 아빠가 다녔던 학교가 유별난 학교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빠는 반에서 거의 꼴등이었어. 고등학교에서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은 엄청 많다는 걸 깨닫고 주눅 들어 살 때도 있었지.
계획이 유연해야 한다는 핑계로 대학 초년을 피시방에서 보내며, 학교 공부도 뒷전이었지. 도서관에서는 1시간도 있기 힘들어했고, 수업도 너무 지루했어. 지금 아빠 수업을 열심히 들으려 오는 학생들이 대단하다 생각할 따름이야.
그렇게 방황 아닌 방황을 하다가, 처음으로 스스로 하는 공부에 맛이 들린 뒤엔 공부하는 게 어렵지 않더라. 결국 나는 정해진 답이 있는 공부보다 답이 정해지지 않은 연구에 더 잘 맞는다는 걸 대학원에서 금방 깨달은 거 같아.
아빠 인생에서 이 깨달음이 두 번째 큰 축복이야. 엄마를 만난 거 다음으로…
하지만 이 확신이 들기 전까지 허송세월을 좀 보냈지. 사시, 행시에 합격하고 연수원에 들어가는 친구들, 회사에 취직하여 돈을 벌기 시작하는 친구들을 보면 나는 뭐 하고 있나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어.
그런데 치열한 고민 끝에 얻은 확신은 나중에 빛을 발하더라.
5년이 넘는 박사과정이 힘든 이유는 다른 동년배들이 성장해 갈 때 나는 성장이 더디다고 느끼기 때문이거든. 아빠 친구들도 중간에 회의감이 들어 많이 힘들어 했어.
근데, 아빠는 확신이 있었거든.
난 연구가 좋아.
그리고 못하지 않았던 거 같아.
좋아하는 것과 잘 하는 게 같다는 것도 축복이야. 잘 하고 좋아하는 일에 확신을 가지고 하니, 일이 즐겁지 않을 수 없더라. 일이 쉬워 보이더라.
사실 박사과정에서 위기도 몇 번 있었지. 그래도 어려운 과정을 이겨낸 건, 아빠의 확신이 준 내적 동기 덕분인 것 같아.
거북이와 토끼를 기억해. 예전엔 공감가지 않는 우화였는데, 아빠의 경력이 그런 것 같아. 아빠는 제일 똑똑하지도 않아. 하지만 계속할 수 있는 동력은 있었어. 그래서 나보다 더 큰 재능을 보이면서 앞서가던 사람들이 언젠가부터 내 앞에 안 보이더라. 토끼들이 이 길이 맞나 하는 고민을 하며 잠시 멈출 때, 아빠는 앞만 보고 갔나 봐.
마흔 중반을 바라보는 지금,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이 다음 단계에 대한 확신이 필요한 것 같아. 이제 무엇을 잘 하고 좋아하는지는 아는데, 무엇이 의미 있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사회에 어떻게 공헌할 수 있을지. 이런 질문에 대한 확신이 필요한 때인가 봐.
하루아침에 오진 않겠지. 남들의 조언으로만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확신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어느 날 찾아오겠지. 하지만 그 확신이 들었을 때 거북이처럼 가야겠어.
너희도 아빠처럼 확신을 가지게 되길 바란다. 그런 축복이 있기를.
너희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