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잘한다는 것

말을 잘하고 싶은 열망이 작아진 이유

by 어느여름밤



말을 잘하고 싶던 때가 있었다. 학교 다닐 때 보면 반에, 과에 말을 조리있게 잘하는 이들이 꼭 한 두명 씩 있었다. 여유가 넘쳐 위트와 농담까지 곁들이며 좌중의 분위기까지 압도하는 이들도 꽤 있었다. 조발표 활동을 할 때 나는 주로 자료조사나 ppt 작성을 맡는 쪽이었다. 그 역할을 기가 막히게 잘해서라기보다 발표에 크게 자신이 없어 주로 그런 역할을 맡곤 했다. 내심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연습도 해볼 겸 발표를 맡아보고 싶기도 했는데 괜히 잘 못해 다른 조원들에게 피해가 갈까 굳이 먼저 하겠다고는 잘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학생활을 하다보면 앞에 나가 발표를 할 일이 생기곤 했다. 발표를 마치고 들어올 때마다 드는 생각은 ‘아.. 진짜 나 왜이리 말 못하냐.’. 사시나무도 아니고, 떨기는 또 왜 그리 떠는건지, 발표할 때마다 자괴감이 들곤 했다.



한번은 대학 4학년 즈음이었나. <현대 시> 수업 시간이었다. 현대 시인 한 명씩 맡아 조별로 발표하는 수업이었다. 우리 조에 낯선 얼굴의 남학생이 있었다. 우리 과 학생도 아닌 것 같고, 일단 겉으로 봤을 때 발표 잘하는 상(?)은 아니었다. 조용하고 아주 내성적으로 보이는 인상이었다. 발표를 누가 맡을 건지 얘기를 나누는데 먼저 그 분이 하고싶다고 말을 했다. 조원들 반응은 뜨뜨미지근했다. 나 또한 솔직한 마음으로 그 분이 그렇게 발표를 잘할 것 같지 않아 점수에 영향이 갈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렇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하겠다는 분에게 하지 말라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발표는 그 분이 맡기로 했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 조가 발표하는 날이었다. 발표자분은 A4용지 빡빡하게 발표대본을 준비해 온 것 같았다. 준비한 종이 한 장을 들고 강단에 올라가 발표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분은 15분 가량 발표하는 동안 그 종이를 한~번도 보지 않고 발표를 이어갔다.

친한 동기랑 나는 그분이 발표를 하는 걸 보며 약간 감동 아닌 감동을 받아버렸다. 분명 전형적으로 잘하는 스타일의 발표는 아니었다. 마치 래퍼인냥 말도 엄청 빨랐고, 청중들과 소통할 여유도 없어보일 정도로 준비한 내용을 쏟아내기에 바빠보였다. 그럼에도 왜 그 분의 발표가 인상적이었냐면, 정말, 성실하게, 열심히 준비한 것 같았다. 그 많은 내용을 대본 한번 보지 않고 달달 외울 정도로. 손에 든 종이가 흔들리는 게 다 보일 정도로 엄청 떨면서도 한번도 멈추지 않고 열심히 발표를 이어나갔다. 역시나 진심은 통하는 걸까. 우리 조 발표가 끝나고 교수님이 흐뭇한 웃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 분에게 따스한 무한 칭찬을 건내셨다. 발표는 이렇게 하는 거라며, 준비를 참 많이 한 게 느껴져 너무 좋다고. 학생들의 틀에 박힌 발표를 얼마나 봐오셨을까. 그 분보다 더 잘한 발표도 물론 많이 봐오셨겠지만 교수님의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렇게 진정성 있는 발표는 참 오랜만에 본 것 같다고.

나 또한 대학 다니며 정말 말 잘하고 발표 잘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지만, 이 날 남학생의 발표는 객관적으로 뛰어난 발표가 아님에도 신기하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어떤 스피치 대회같은 게 있어 그 분이 참가자로 나갔다면 우수한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발성도, 속도도 고르지 못한 약간은 부족한 발표력이었지만 그 열심과 진심이 듣는 사람에게 충분히 전해져 15분 내내 집중이 잘 되고 귀에 쏙쏙 들어오는 시간이었다.

나는 어땠나. 말을 잘하고 싶다는 생각, 열망은 늘 있었지만 발표할 기회가 있을 때 그 학생처럼 아예 통으로 외울 정도로 노력은 해보았을까. 생각해보면 그 정도의 노력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몇 년 전 다이어트 관련 유튜브를 찾아보다 한 유튜버의 영상을 보게 됐다. 영상이 흘러나오고 유튜버분 본인만의 다이어트 비법 이야기가 시작됐다. 태어나 처음 보는 말투였다. 뭐가 이리 급하시지? 하는 생각이 들만큼 이 분도 말이 엄청 빠르고, 처음 들었을 때 말투도 너무 웃겼다. 티비나 유튜브 등에서 무언가 말로 전달하는 사람들 중에는 흔히 전달이 잘되게 들리는 ‘아나운서 톤’의 말투를 쓰는 이들이 많다. 그게 아니면 대부분 평범한 화법과 말투를 가진 이들이 많다. 그런 흔하고 차분한 말투에 익숙하다 이 분의 말을 듣는데 너무 웃기면서 신기하고 처음엔 적응이 잘 안됐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 영상을 계속 보았던 건 내용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틀에 박히고 뻔하디 뻔한 다이어트 비법이 아닌 실제 본인이 경험한 이야기를 풀어내어 내용이 하나하나 와닿았다.


한 때 말을 잘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한번은 스피치 동호회 까페에 가입해 오프라인 모임에 일회성으로 참가한 적도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말을 잘하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히 있지만 이제는 그런 노력까지 기울이지는 않는다. 또 예전만큼 말 잘하는 것에 대한 열망이 그리 크지 않다. 어느 시점부터 나는 책과 글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이는 사람이 되었고, 말도 잘하면 참 좋겠지만 이제는 말 잘하는 사람보다 글 잘 쓰는 사람이 더 부럽고, 말 잘하는 사람보다는 글 잘 쓰는 사람이, 더 되고 싶다. 다 가질 수 있다면 제일 좋겠지만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적이기에 여기에도 선택과 취사가 필요한 것이다.


대학 수업 때 우리 조 발표자분, 이 유튜버 분을 생각하면 ‘말을 잘한다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이 두 분은 말을 ‘전형적으로’ 잘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도 생각날만큼 인상깊고, 좋았던 말하기로 기억된다. 대학 때 조원분은 비록 서툴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듣는 사람들에게 진심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는 점에서 훌륭한 말하기였으며, 다이어트 유튜버님은 전형적인 말하기 톤과 스타일이 아니지만 내용 자체가 좋다보니 그 말투마저 오히려 개성있게 느껴지고, 더 재밌게 다가왔다.




말을 잘하면 사는데 꽤 도움이 된다.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고,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도 있고, 어딜가나 쉽게 호감어린 주목을 받기에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말로 먹고 사는 직업을 가진 사람, 또는 일할 때 말을 많이 하는 업무가 있는 사람은 어느 정도 그 능력을 키워보면 좋겠지만, 그게 아닌 나같은 사람이라면, 발성, 톤, 화법이 아나운서처럼 전문적이지 않아도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핵심을 잘 전달할 수만 있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말끝을 흐리지 않고, 상대의 눈을 바라보면서 차분하게 내용을 잘 전달할 수만 있다면야, 사는데 딱히 문제가 있을까. 내가 더 잘하고 싶고 꾸준히 하고 싶은 것이 분명히 있기에 말을 하는 능력은 이 정도로도 그냥 만족하며 살고 싶다. 언젠가 지금보다 말을 더 잘하고 싶은 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도 지금도 말보다는 글이 내게 더 큰 열망과 소망의 대상이기에, 더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며 살고 싶다. 살면서 말 잘하는 사람은 꼭 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런데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 더 잘 쓰는 사람은 되고 싶다.


확실한 건 하나 있다. 말이든 글이든 잘하게 되는 방법은 그냥 계속 해보는 것, 써보는 것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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