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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진 Nov 21. 2024

어떤 호의

 15년 전 오사카에서 있었던 일이다. 우리 가족은 ‘몸만 가면 된다.’는 아버지의 철칙에 따라 패키지 여행을 즐겨 가곤 했다. 오사카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는 배로 가도 하루면 갈 것 같은, 심리적으로도 너무 가까운 그 나라로 몸만 가버리는 쉽고 간편한 선택을 했다.


 패키지 상품에는 하루 동안의 자유시간이 포함되어 있었다. 엄마는 아버지의 ‘몸만 가면 된다.’는 철칙에서 약간의 숨구멍을 찾은 듯, 그 시간을 어떻게 하면 가장 알차게 보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결과 우리는 일본 기차JR을 탔다가, 지하철로 환승하여 오사카 도심을 둘러보기로 했다. 계획을 세우는 것까진 좋았다. 문제는 패키지 상품에 늘 있는 맹점, 숙소가 도심에서 너무 멀다는 것에 있었다. 방값을 적당량 세이브할 수 있다는 커다란 장점은 일본에 ‘몸만 온‘ 우리에게 ‘속았지?’를 외쳤다.


 엄마가 가고싶어했던 도심은 오사카 시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돈키호테가 있었고, 커다란 다리를 건넜으며, 젊은 일본인들이 크리스마스의 명동거리처럼 바글바글했다. 거리를 가기 위해 시골 숙소 근처의 JR역으로 향했다. 엄마는 우리를 이끌기 위해 암호 같은 일본어를 메모한 종이를 손에 꽉 쥐었다. 스마트폰을 보고 가도 일본 지하철은 너무 어려운데 하물며 15년 전에는 어땠을까. 어쩌면 당연하게도 우리는 몇 번의 착오를 겪었고, 몇 번의 행방불명을 감당했다.


 그러다 결국, 우리는 길을 잃었다. 지하철 한복판에서 말이다. 국제 미아가 된 듯한 난처하고 울적한 기분은 누구보다 엄마가 가장 진하게 느꼈으리라. 한참을 헤매던 우리가 그 시절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기로 결심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손짓 발짓을 동원해가며 지나가는 일본인에게 말을 걸었다. 몇 번의 질문이 있었고, 몇 번의 지시가 있었으며, 몇 번의 시행이 있었으나 우리는 도돌이표처럼 여기로 갔다가 저기로 갔다가 했을 뿐이었다.


 엄마가 서툴게 받아적은 일본어와 똑같은 글자가 있는지 주위를 미어캣처럼 살피던 우리 가족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그였다. 동방신기가 한창일 때 했던, 지금은 아무도 하지 않는 긴 머리를 한 남자. 검정색 코트를 입은 일본인. 그리고 짙은 바닐라향이 곁에만 가도 진하게 나서, 대체 무슨 향수일까 고민하게 했던 사람.


“제가 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는 서툰 한국말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있는 우리에게 그는 슈퍼맨이었다. 엄마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메모장을 내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위험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아, 이건 저기로 가야해요. 저 따라오시겠어요?”

그는 뚜벅뚜벅 앞장서서 걸었고 그렇게 일본인 한 명과 한국인 네 명의 이상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아빠는 일본인이 신기했는지 자꾸만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중2병의 정중앙을 지나고 있던 터라 그게 조금 부끄러웠지만, 귀는 계속 쫑긋 세워두었다. 귀찮을법도 할텐데 그는 조금의 내색도 없이 아빠의 진또배기 경상도 사투리를 되물으며 친절히 대답해주었다.

“무슨 일 합니꺼?”

“아, 의대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에요.”

“한국은 와봤십니꺼?”

“한 번도 못 가봤어요.”


 그렇게 10분을 넘게 걸었던 것 같다. 나는 그의 발걸음 닿는 곳마다 진하게 남은 바닐라향을 킁킁대며 ‘저 사람, 분명 가던 길 있는 거 아니였어? 어디까지 같이 가주는 거야?’를 고민했다.

“여기서 타시면 됩니다.“

그는 기어코 우리를 목적지까지 데려다 놓았다.

“감사합니다. 우리가 뭐라도 사드려야될 것 같은데.”

연신 감사를 표하는 엄마와 아빠는 누가봐도 진심이었다.

“아닙니다. 즐겁게 여행하세요.”

그는 그렇게 말하곤 싱긋 웃으며 우리가 왔던 그 길을 그대로 되돌아갔다.


“아유 다행이다. 저사람 없었으면 어쩔 뻔 했어.”

아빠는 말했다.

“그러게. 일본 지하철은 너무 어렵네.”

엄마가 답했다.

“엄마 저사람 잘생기지 않았어?”

언니가 말했다.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뒷모습이 작아질 때까지. 공기 중에 남은 이제는 옅어진 바닐라향을 킁킁대며.


 그때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한 번 보고 말 사이인, 어쩌다 다시 만날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외국인에게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마음이란. 중2병이었던 당시의 나는 이해할 수 없던 마음을 그의 나이가 된 지금에서 헤아려봐도 선뜻 추측하기가 힘들다. 그건 어떤 크기의 마음일까? 어떤 크기의 호의일까?


 그날 이후로 일본을 떠올리면 그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 동방신기 머리, 검정색 코트, 그리고 짙은 바닐라 향. 그 덕분에 한 나라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완전히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또, 서울에 갈 때마다 마주치는 일본인을 보며 ‘도와줄 거 없나?‘ 살펴보게 되었다.


어떤 호의는 누군가의 기억에 두고두고 남을 수 있다. 오늘 나는 어떤 호의를 베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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