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만약에 우리가 헤어지게 되면, 여기서 다시 만나자.”
“여기?“
“응. 여기.”
“난 너랑 안 헤어질건데?”
“아이, 그러니까 만약에라고 했잖아. 만약에!”
“만약에라도 안 헤어질 거라니까.”
“됐다 됐어. 없던 일로 해!”
“아아, 알겠어. 언제, 몇 시에?”
“음… 그 해에 첫눈 오는 날?”
“…”
“어때?”
“좋아.”
…
몇 달 후 11월, 세상은 실수로 흰 색 물감을 엎어버린듯 새하얗게 물들었다. 첫 눈이었다.
“와, 눈 온다! 올해 첫 눈이야!”
희영은 혀를 쏙 내밀고 떨어지는 눈을 맛보며 말했다.
“야, 그걸 더럽게 왜 먹고 있어!”
현수는 희영의 어깨죽지를 뒤로 당기며 말했다.
“치. 뭐가 더러워. 이렇게 새하얀데.”
“천하의 김희영을 누가 말려.”
“우리 몇 달 전에 했던 약속 기억나?”
“무슨 약속?”
“왜 있잖아~”
“뭐, 뭐지?”
현수가 불안한 눈초리로 희영을 바라보았다.
“와 강현수. 또 기억 못하네.”
희영은 고개를 가로로 저으며 현수를 째려보았다.
“아 뭔데. 말 하면 알지!”
“됐어. 기억 못하면 땡이야!”
“아 말해줘어!“
희영은 현수를 한 번 흘겨보고, 못 들은 척 앞서 걸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현수는 머리를 굴려보다가 희영의 “빨리 안 와?” 한 마디에 허겁지겁 그녀를 뒤따랐다.
둘 사이엔 언제나 다섯 발자국 만큼의 간격이 있었고, 현수는 그런 희영을 뒤쫓기 위해 걸음을 서둘러야만 했다.
현수는 최대한 빨리 걸었다. 달리듯이 걸었다. 조금만 더 걸으면 금새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짠! 첫 월급 선물이야!“
“이게 뭐야?…우와! 내가 갖고 싶어했던 목걸이네!”
“맘에 들어?”
“응! 완전! 고마워 현수야, 감동이야.”
그 날 현수는 따끈한 카페 라떼를 마신 것처럼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꼈다.
언덕을 오르기도 했다. 올라도 올라도 끝이 없는 설산처럼 아득하기만 한 그녀의 마음을 짐작해보며.
“희영아, 언제 끝나?“
“나 오늘도 야근이야. 먼저 자.”
“아.. 그래? 데리러 가려 했는데.”
“추운데 걸어가기 싫어. 팀장님 차 타고 갈래.“
“….알겠어.”
“끊어.”
그 날 현수는 다 식어버린 핫팩을 손에 쥔 것처럼 허탈했다.
아무리 쫓아도, 아무리 올라도, 빙판길에 미끄러지는 발걸음일 뿐이라고 느꼈던 날 현수는 결심했다.
“희영아.”
“응.”
“내가 많이 부족한 것 같아.”
“…?”
“미안해.”
“왜 그래 갑자기.”
“…”
“팀장님 때문이야?”
“중요하지 않아. 이젠.”
쌓인 눈더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부러지고 마는 나뭇가지처럼, 현수는 스스로 뭉치고 쌓아올린 감정더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서져버렸다.
…
첫 눈이었다. 현수는 거리를 포근히 덮어가는 눈송이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직도 내리는 눈송이를 혀로 받아 먹으며 깨끗하다고 하고 있으려나.’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걔도 많이 바뀌었겠지.”
현수는 작게 읊조리며 거리를 살폈다.
코끝이 빨갛게 물들었을즈음 현수는 걸음을 옮겼다.
다시 첫눈이다. 현수는 카멜색 머플러에 얼굴을 묻고 작은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캐롤을 들으며 주변을 살폈다.
폭설 때문인지 거리에는 인적이 없었다. 현수가 만들어내는 하얀 입김만이 여기 생명이 있노라고 말해주었다.
‘분명 기억하고 있을텐데.‘
몇 곡의 캐롤을 흘려보냈을 때 현수는 머플러를 고쳐메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또 다시 첫눈이다. 현수는 좌우로 바쁘게 움직이는 자동차 와이퍼를 바라보았다. 와이퍼를 따라 아래위로 흩어지는 눈송이들을 눈으로 쫓았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핸들만 몇 번 꺾으면 된다.‘
빵-
그런 현수를 깨우기라도 하듯 뒷차가 클락슨을 울렸다.
현수는 핸들을 꺾는 대신 오른발에 힘을 주어 악셀레이터를 밟았다.
다섯 발자국이면 닿을 것이었다. 언제나 다섯 발자국이었다.
그러나 현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눈길 사이로 현수는 헤드라이트를 켠 채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