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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껏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그래도 안전한

by 이어진


남자친구에게 자기 전에 책을 읽어달라고 졸랐어요.

평소에 잘 안 하던 짓인데요.. 왜 그런 날이 있잖아요. 괜히 어리광 부리고 싶은 날. 어릴 때 엄마한테 하던 것들을 괜스레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도하며 우리 관계가 여전히 튼튼함을 확인받고 싶은 날. 제게는 어제가 그런 날이었던 것 같아요.


게다가 국어교사인 남자친구는 낭독을 할 때마다 잘생긴 목소리를 내곤 하거든요. 평소 듣던 목소리가 개그맨이라면, 낭독 할 때의 목소리는 배우입니다. 그것도 아주 중후하고 댄디한 중년 배우요.

“아 제발~ 읽어줘라! 응?”

착한 제 개그맨은 이정도 떼를 쓰면 보통은 잘생긴 배우가 되어줍니다. ‘갑자기 왜?‘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면서도 말이죠.

“알겠어. 무슨 책 읽어줄까?”

“아무거나!“

“흠..”

책장을 훑어보던 남자친구는 명상 책 한 권을 집어들었습니다. 제목은 <놓아버림>이었어요.

“이거 읽어줄게. 내용 좋아. 어진이도 다음에 읽어봐.”

후후. 내 뜻대로 되었군. 그런 생각을 하며 이불 속으로 몸을 낑겨 넣고는 눈을 감았습니다.


“타고난 능력으로 행복과 성공, 건강, 안락, 직관…..”

아아 이게 얼마만에 듣는 잘생긴 목소리인지. 그의 낭독은 따끈한 쌀밥을 고깃국에 말아 먹었을 때와 비슷한 든든한 포만감을 느끼게 합니다.


역시 조르길 잘 했다고 생각한 순간…아니 분명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것을 마지막 기억으로…

네… 잠들어버렸습니다.

눈을 떠보니 캄캄한 새벽이더라고요? 이놈의 잠은 꼭 이럴 때 참을 수 없이 쏟아집니다. 기납부한 어리광의 가성비가 떨어질 정도로 말이죠.


머쓱해진 마음을 숨기지 않으며 다음날 그에게 카톡을 보냈습니다.

“오빠 어제 책 읽어줘서 고마워.”

“어이없어! 한 페이지 읽었는데 코골면서 자더라.“


머쓱함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으며 뻔뻔하기까지한 저는 다가오는 다음 어리광도 책을 읽어달라고 조를 예정입니다. 그때는 조금 더 버틸 수 있겠죠?

양껏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그래도 안전한, 제법 축복적인 날들이 이어진 요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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