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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책과 별과 현실

by 이어진

엄마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조르는 습관이 있었다. 8살~10살 정도 무렵이다. 그때쯤의 나는 혼자서도 꽤나 글밥이 있는 책을 읽을 수 있었기에 엄마가 ‘책 읽어주기‘를 서서히 그만둘 참이었다. 나는 왜 이제는 더이상 책을 읽어주지 않느냐고 칭얼대며 과거의 엄마와 현재의 엄마를 비교하곤 했다. 그러면 가엾은 엄마는 내 똥고집에 못이겨 책을 골라오라고 말했다. 나는 혹시나 엄마 마음이 바뀔까 전전긍긍하며 책꽂이에서 무슨 무슨 공주하는 책을 빼갔다. 그리고는 엄마 무릎에 턱하고 누워 눈을 감았다. 엄마는 내 왼쪽 볼 위로 책을 올려두고는 낭독을 시작했다.


그시절의 나는 체력이 무서울 정도로 좋았기에 웬만큼 스토리가 전개될 때까지 쉽게 잠들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무서울 정도로 많은 일을 헤치우고 맞이한 저녁이었기에 쉽게 졸음을 이겨내지 못했다.

“세라는 방으로 올라가서…”

졸음이 잔뜩 낀 엄마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들려오지 않으면 나는 놓치지 않고 감고 있던 눈을 번뜩 떠서 무릎을 흔들었다. 졸지 말라고. 아직 안 자니까 계속 읽으라고.

“아우 엄마 너무 졸리다 유진아.”

“아 안돼~ 좀만 더 읽어줘!”

“흠냐. 세라가 방으로 올라가서…”

엄마가 뒷내용을 마저 읽으면 그제서야 안심을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귀에는 엄마의 졸음 가득한 목소리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언제까지고 이어졌다.


그시절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는 대개 비슷했다. 신데렐라, 콩쥐팥쥐, 키다리아저씨, 소공녀… 그런 스토리들은 대개 디테일만 조금씩 다를 뿐 큰 틀은 같다. <개고생-굴하지 않고 씩씩하게 살아감-남주 등장-구원>으로 이어지는 뻔한 스토리. 그 뻔한 스토리들이 그때는 왜 그렇게 좋았는지. 그것들을 졸음과의 사투를 벌이는 엄마와 사투해가며 밤마다 한 권씩 섭렵해나갔다. 그무렵 내 꿈엔 멋진 왕자님이 자주 등장해 내 굽은 등을 펴주곤 했다.


세라는 다락방의 작은 창가에 앉아 새카만 하늘에 뜬 별을 바라보았어요. 그중에서 가장 반짝이는 별은 꼭 세상을 떠난 아빠의 모습 같았답니다.

“끼끼”

그때였어요. 세라의 작은 다락방 한 켠에서 원숭이의 울음소리가 들린게 아니겠어요. 세라는 얼른 고개를 돌려 원숭이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봤어요. 그곳에는 원숭이를 안고 있는 캐리스포드 아저씨가 있었어요.

“네가 내 친구의 딸이였구나!”

“네?”

“너희 아버지는 다이아몬드 광산 산업이 망한 것으로 알고 세상을 떠났지만 사실은 아니었단다. 아버지가 세라 네 명의로 아주 많은 재산을 남겨놓으셨어.”

“어머나 그게 정말이세요?”

(그시절 읽었던 소공녀의 일부 내용을 아주 짧게 각색해보았다.)


공주 시리즈물의 진정한 맛은 위와 같은 장면이다. 남주가 등장하여 이제 여주인공의 개고생이 끝날 것임을 암시해주는 장면. 저걸 위해 그 오랜 시간을 달려온 것이다. 듣기 괴로웠던 공주의 개고생을 버텼던 것이고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엄마를 흔들어가며 깨웠던 것이다. 어린 나는 플롯이고 이야기의 구조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하나도 알지 못했지만 공주가 겪은 앞선 개고생들이 저장면과 함께해야만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됨을 본능으로 알았다.


이제는 엄마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조르지 않는다. 나이는 29살이고, 글밥 꽤나 있는 글은 한달에 8권씩 읽어낼 수 있다. 공주 스토리물은 더이상 내 흥미를 자극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이제 너무 뻔하다. 그리고 사실 조금 불편하다. 왜 혼자서는 헤쳐나갈 수 없지?하는 생각이 감상을 쿡쿡 쑤셔 방해한다. 젠더의식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고전물들이 여전히 수정되지 않고 있음에 화가 나기도 한다.


게다가 여주인공들이 겪고있는 개고생은 이제 나의 현실이다. 현실은 더 현실같다. 비극적인 현실에 굴하지 않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건 신데렐라도, 세라도 아니고 바로 나다. 아무리 굴하지 않고 살아도 아니 가끔은 완전히 굴복해서 덜컥 함부로 넘어져버려도 남주는 등장하지 않는다. 구원은 너무 아득해서 좀처럼 형태를 예상 할 수 없다.


나는 내 방 작은 창가에 앉아 새카만 하늘에 뜬 별을 바라본다. 그 중에서 가장 반짝이는 별은 세상을 떠난 엄마라고 믿을 수 밖에 없다.

“카톡”

그때 스마트폰 알람이 울린다. 개고생중인 나를 그나마 일으켜 세워주는 연락이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짐짓 미소를 짓는다. 혼자 있었다면 짓지 못했을 미소다. 젠더의식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구원은 도무지 혼자서 해낼 수 없고 오늘의 현실은 어제보다 더 현실같은 현실이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자. 할 수 있는 것만.”

귀에는 그런 말들이 끊이지 않고 스스로를 독려하듯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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