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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진 Jun 05. 2024

축가를 정했다.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

 어렸을 적 피아노를 잠깐 배웠다. 오래는 아니고, 2년 정도. 피아노는 플루트를 불기 위해 배웠고, 플루트는 내 엄마의 신념을 위해 배웠다. 엄마는 '내 딸은 악기 하나 정도는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렵게 말했지만 내 의지는 조금도 포함되지 않는 인과관계에 의해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피아노는 너무 어려운 악기였다. 그 시절의 나는 여자친구들과 모여 흙장난을 하는 것 말고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피아노 학원 연습실에 난 작은 창에는 친구들이 신나게 뛰어노는 모습이 너무도 잘 보였다. 그러면 나는 친구들이 뭐하는지 훔쳐보다가, 연습을 하는 척하다가, 포도알을 채우다가... 그렇게 엉덩이가 들썩들썩거렸다.


 어차피 잠깐 배우는 피아노임을 알고 있었기에 동기는 더더욱 유발되지 않았다. 그 시절 언니는 무슨 무슨 콩쿠르대회라도 나가는 것 같았는데, 나는 그마저도 아니었다. 그런 내가 딱 한 곡, 20년이 지난 지금도 손이 기억하는 곡이 딱 하나 있다. 그건 <사랑을 위하여>다. 김종환 씨가 1997년에 낸 곡. 당시에는 30대 이상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1위로 뽑혔을 정도로 대히트를 쳤다고 하는데, 나는 그때 만 0살이었으므로 그런 사실까지는 몰랐다. 엉덩이를 들썩하며 피아노를 연습하던 2000년대 초반에는 그 노래가 동요인 줄로만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곡은 <어린이를 위한 피아노 동요집>에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을 위하여는 동요집에 있던 여느 곡들과 다름없는, 그렇고 그런 곡들 중 하나였다. 아니, 오히려 기피하는 곡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어진이에게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 어렵고 조금은 창피한 것이었으니까. 그것보다는 피노키오, 장난감 병정, 루돌프 사슴코와 같은 흥겹고 다소 유치한 곡이 더 마음에 들었다. 


 너무 어렵고 조금은 창피한 그것이 내게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봄볕이 쏟아지는 주말 아침이었다.


 우리 집에는 엄마가 큰맘 먹고 산 고동색 삼익 피아노가 있었다. 그날은 아마도 피아노 학원 숙제로 연습(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을 위하여는 그다지 연습하고 싶은 곡은 아니었으나 무슨 이유로 그걸 뚱땅거리고 있었고, 그걸 들은 엄마가 곁으로 왔다. 그리고는 내 연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

물안개 피는 강가에 서서

작은 미소로 너를 부르리


 가사를 보지도 않고 따라 부르다니. 뚱땅거리는 것을 멈추고 물었다.

"뭐야? 엄마 이 노래 알아?"

엄마가 으쓱하며 대답했다.

"당연히 알지. 사랑을 위하여.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야."

"진짜? 엄마는 노래 안 좋아하잖아."

"엄마도 옛날엔 좋아했어. 계속해봐. 엄마가 옆에서 따라 부를게."

"우와, 좋아! 내가 칠 테니까 엄마가 부르는 거야!"


 그건 내가 처음 겪어본 하모니였다. 뚱땅뚱땅과 흥얼흥얼. 다 자라지도 않은 손으로 이상하게 대충 뚱땅뚱땅 할 줄만 알던 아이가, 처음으로 반주 비슷한 것을 해 본 순간이었다.  


 그 후로 그 곡만 연습했다. 주말이면 그렇게 싫어하던 고동색 피아노에 앉았다. 피노키오도, 장난감 병정도, 루돌프 사슴코도 전부 뒷전이었다. 흙장난하는 것에 인생을 걸었던 아이가 사랑을 위하여를 악보 없이 칠 수 있을 때까지 연습했다. 그렇게 연습해서 어디에 썼는가. 엄마를 끌고 오는 데 썼다. 내 목적은 그것뿐이었다. 엄마랑 같이 뚱땅뚱땅 흥얼흥얼 하는 것. 피노키오보다 장난감 병정보다 루돌프 사슴코보다 나를 설레게 하는 것.


 여러 날 동안 연습했고, 여러 날 동안 엄마를 끌고 왔다. 여러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순간들은 중첩되고 녹이 슬어 하나의 장면으로만 진하게 남았다. 반쯤 투명한 노란색 기름종이들을 겹쳐 놓으면 원색의 노란색이 나오듯 말이다. 그 장면은 이를테면 고동색 피아노, 어디선가 불어오는 노란색 바람, 봄볕, 빵과 소시지 냄새, 우유, 왼편에 서 있는 엄마, 엄마의 노래, 특유의 음색 같은 감각들로 점철되어 있다.


 






 사랑을 위하여는 오래된 노래이다. 신촌에 있는 실내가 온통 통나무로 되어있는 독수리 카페에서나 들을 수 있을까 말까 한 곡이다. 나 역시도 한동안 잊고 살았다. 그러다 우연히 그 노래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날씨가 제법 따뜻했던 5월 초순, 요즘 내 일주일을 가득 채우는 당신과 함께 있을 때였다. 그날도 여지없이 당신과 일주일을 채워나가고 있었는데, 우리 만큼이나 인기가 없는 광화문 '티처카페'에서 나와 세종문화회관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 길에는 '누구든 칠 사람 쳐라!' 하는 피아노가 있었고 젊은 남자 둘이서 이름 모를 화려한 곡을 뽐내듯 연주하고 있었다. 


앞을 보며 걷던 당신이 물었다.

"피아노 칠 줄 아는 거 있어요?"

나는 습관적으로 떠올렸다.

"딱 한 곡 칠 수 있긴 한데.."

나는 잠시 5월의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


 그러고도 며칠 후, 5월 말이 되어서야 그 노래를 다시 찾아들었다. 가사를 읽었다. 노래를 불렀다. 한 번 더 들었고 한 번 더 따라 불렀다.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여도 

우리 둘은 변하지 않아

너를 사랑하기에 저 하늘 끝에

마지막 남은 진실 하나로

오래 두어도 진정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남게 해 주오


그리고는

하루의 대부분 손 닿는 거리에 있는 당신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리고 말했다.

"저 축가 정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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