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에 용기내지 못한 면허따기
면허는 반드시 수능이 끝나고 바로 따야 한다. 세상을 다니는 속도가 결정되는 건 의외로 짧은 겨울의 그 몇 달일 수도 있다. 내가 스무 살 땐 지금보다 면허 시험 난도가 낮았으며 학원비가 저렴했다고 안타까워하는 건 둘째 치고, 도로에 야수의 심장으로 나가는 어린 날의 과감함이 없으면 점점 더 무서워지는 게 제일 문제다.
그래도 다행히 혼자 여행을 해보겠다는 결심은 지켰다. 덕분에 이젠 여름, 겨울 분기별로 한 번씩 떠나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인간이 되었다. 뚜벅이로 열심히 다니면 크게 불편한 건 없다. 그게 문제다. 내 세상이 얼마나 좁은지도 모르는 편안함. 때는 2025년 여름, 차 없으면 불편하기로 유명한 제주 여행에서 뻔하게도 면허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느꼈다. 당연히 불편함이나 고생은 없었다. 제주도도 생각보다 시내버스가 자주 다닌다. 공항 아주 근처에 숙소를 잡고, 거기서 조금만 가면 나오는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이 내 여행 코스의 대부분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무언가 한구석이 답답했다.
혼자 이틀 넘게 신나게 놀다가 조금 지겨워질 즈음 우연히 들어간 선물 가게 사장님께 주변에 갈 만한 곳 있냐고 여쭤보니, 젊은 사람들은 탑동 쪽에서 밤에 음악도 틀어놓고 재밌게 노는 것 같다고 하셨다. 술도 안 좋아하고, 영 숙맥인 나는 클럽이니 술집이니 하는 곳을 거의 안 가봤다. 가서 좋을 것도 없다는 생각이었는데 스물아홉 살이라 그랬나, 이런 곳도 나중엔 아예 들어갈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기간 한정 할인 상품을 놓치는 것처럼 아쉬워졌다. 서울에는 괜히 아는 사람을 마주칠 수도 있겠지만 여긴 제주도니까 어때? 낯선 검색어인 혼술 바를 쳐서 저장해뒀다. 일탈의 증거 같아서 괜히 뒷덜미가 가려워 화면을 급히 가렸다.
잠시 망설이다 가게에 들어가보니 친절한 사장님이 반겨 주셨다. 합석 술집이라는데, 아직 손님이 많지 않아 어색하게 프레첼을 먹었다. 시간이 흘러 내 양 옆에 나보다 한참 어린 남자가 한 명, 두 살 정도 많았던 남자가 한 명 있었고 기억도 나지 않는 시답지 않은 말들이나 했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며 새로운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사장님이 스몰토크를 시도했고, 당연하게도 모두가 여행자였다. 오자마자 차를 렌트했고, 그걸 어디에 주차했으며 내일은 남쪽 지역에 가려고 한다는 말을 들으며 나의 아쉬움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혼자 독립서점, 문구점도 다니고 맛집도 갔다가 북카페, 미술관 다 갔지만 뚜벅이인 나는 국내 어디서든 할 수 있는 활동만 하고 있었다. ‘제주도 스러운’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접근성이 너무 안 좋아 대중교통으로는 이동 시간에 반 나절은 기본으로 써야 했다. 비슷한 시기에 제주도를 방문한 어떤 블로거는 한 해 볼 초록색을 다 보고 왔다는 내용으로 포스팅을 올렸었다. 멋진 산과 들이 전부 진초록이라 눈이 편했다. 나는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면허 때문에!
나보다 두 살 많은 그 남자는 계획 없이 방금 막 제주도에 온 참이라며 한 달 정도 휴가라 뭘 할지는 이제 생각해봐야 한다고 했다. 면허도 없고 렌트카는 당연히 없는 나에게 내일 차로 두 시간은 가야 있는 어디에 갈 건데, 원한다면 태워준다는 말도 했다. 악의는 없는 사람 같았지만 다음 날 나는 혼자 놀 코스가 짜여 있었기에 그에게 받은 번호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랑 노는 게 혼자 노는 것보다 재밌을지 누가 보장한단 말인가? 이 험한 세상에.
술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숙소로 가며 다짐했다. 다가오는 가을엔 꼭 면허를 따고, 내년엔 혼자 제주도에서 차로 여행해야겠다.지금껏 엄마의 ‘면허는 꼭 있어야 한다,’ ‘얼른 면허 따라’는 잔소리에 ‘그런가?’하는 불안감만 잠시 일렁였을 뿐 내 동기로 면허를 따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다. 하지만 이번엔 진짜였다.
그렇게 서울로 돌아온 나는 면허학원에 등록을 하지 못했고, 평소 운전 지식이 전무하며 관심도 없는지라 필기시험조차 어려웠다. 공부는 어떻게 하면 하겠는데, 기능 시험이라는 것이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어쩌다 언니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라도 타면, 차선을 바꾸고 신호를 기다릴 때 차의 움직임이 전해졌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다. 주변에 면허 딴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부럽다’, ‘멋있다’는 말로 부채감을 대신하고는 친구따라 강남 갈 기회도 놓쳤다. 혼자 여행하기, 무려 혼술바도 가보기, 그 외에도 다른 많은 걸 했지만 도저히 그 큰 차를 끌고 도로에서 돌아다닐 용기는 나지 않았다. 여전히 내 세상은 좁고 여행 다닐 땐 제약이 많지만 일단은 버스비로 쓸 예산만 넉넉하게 짜는 걸로 합의를 봤다. 새해에도 면허를 딸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