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항상 바쁘다고 했다. 가끔 한 번씩 와서 용돈 조금 쥐어주고, 근황을 주고받았다. 아는 사람, 친한 사람 정도는 될 빈도였지만 확실히 아빠의 빈도는 아니었다. 중학생 때였다. 시간을 좀 보내다 이제 간다길래, 문구점에 아빠를 끌고 가 노크식 노란 형광펜과 볼펜 두어 자루를 샀다. 기억이 잘 안 나도 5천 원보다 덜 나왔다. 아빠는 거스름돈에 몇 만원을 더 얹어 주면서, 이걸로 네 용돈이야, 됐지. 하니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새로 산 펜들을 손에 움켜쥐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아빠 때문에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이니 아빠한테서 용돈도 받고 뭐든 뜯어내라고 자주 이야기했다. 나는 막내임을 이용해서 엄마가 시킨 말을 충실히 지켰다. 엄마는 용돈 얼마 받았냐고 물었고, 내가 주머니에서 동전과 지폐를 꺼냈다. 엄마의 시선이 내 손에 든 펜에 닿았다. 조용히 형광펜을 손에 쥐고 천천히 달칵, 하며 노란 팁이 나오는 모습이 공포스러웠다. 집에 이미 학용품이 많은데 쓸데 없는 걸 샀다고, 환불해오라고 했다. 노크식 형광펜도, 예쁜 펜도 집에 없었지만 엄마는 항상 무서웠기에 길을 나섰다. 겨울이라 추웠고, 곧장 문구점에 가기보다 나는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그럼 아빠가 용돈을 더 주거나 사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 펜들을 난 꼭 갖고 싶었다.
아빠는 용돈을 더 주긴 했다. 만 원짜리를 더 줬지만 내 앞에서 혀를 차며 엄마가 그거 환불해오래? 물었다. 나는 뭔가 일이 잘못 되었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엄마는 내가 환불해오지 않았고 아빠한테 돌아갔다는 걸 어쩌다 알게 됐고 별 말 없이 자리를 떴다. 할머니께 듣기론 아빠가 그 길로 할머니 댁으로 갔고, 마침 친척들이 많이 와 있었고, 그 앞에서 엄마 욕을 했다고 한다.
몇 년이 지나 혼자 문구점에 가서 처음으로 비싼 멀티펜을 샀다. 문구점 폐업으로 할인판매 하던 중에 눈에 들어온 것인데 내가 가진 것들과 다르게 파랗고 투명한 몸통 부분이 예뻤고 찰칵, 하며 눌리는 심이 멋있었다. 8천 원쯤 했다. 엄마는 못 보던 게 있으니 어디서 났는지, 얼마인지 물었다. 차라리 거짓말을 했어야 했는데 8천 원 했다고 말하니 엄마는 비싼 걸 사왔다고 나를 혼냈다. 이미 그걸로 공부를 하던 중 벌어진 일이라 환불은 못 했다. 몇 년씩 지나도 엄마는 두고두고 내가 비싼 걸 사왔다고 말했다.
돈을 벌 나이가 되어 나는 문구를 자꾸 샀다. 집에 있던 구린 펜들 말고 내가 좋아하는 펜도, 스티커도 있었지만 그랬다. 엄마가 뭘 자꾸 사냐고 그만 사라고 해도 듣는 척만 했다. 제법 고가로 유명한 제품들도 가져보고 쓰고 싶던 것, 어릴 때 유행했던 샤프도 눈독 들였다. 물론 할인하는 것들만.
가난이 드리운 그늘이 조금은 걷혔고 억척스러운 절약이 옅어질 무렵 엄마와 일본에 갔다. 3층이 넘는 커다란 문구 센터에서 층마다, 코너마다 멈춰 서서 살까 하면 비싸서 많이 사진 못했다.
매대에 초등학교 저학년용 쓰기 공책이 있었다. 커다란 꽃 사진이 부담스럽도록 크게 박혀있고, 일본어로 뭐라 적혀있었다. 엄마가 반색하며 관심을 보였다. 국민학교 저학년 때 썼던 공책이라고, 이거랑 똑같은 걸 썼었다며. 옛날 생각하는 엄마를 보며 말할 뻔했다. 원래 문구는 이런 거였어.
연필이나 예전 디자인의 지우개 같은 것 앞에 멈춰 선 엄마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다. 혼자 노란 형광펜과 추운 겨울을 떠올렸다. 여전히 망설이는 엄마의 손에서 공책을 뺏어서 카운터로 갔다. 나는 공책의 매끈한 표지를 쓰다듬었다. 얼마 안 되는 페이지를 스륵 넘기며 새 종이 냄새를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