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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 시설, 그저 장식이 아니다(13번째 이야기)

by 진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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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화순의 봄은 야속하게도 성급히 여름을 재촉하고 있었다. 박정경 소방위와 김인수 소방교는 연일 이어지는 소방 검사에 지쳐갈 즈음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어깨는 무거웠다. 화재는 계절을 가리지 않았고, 작은 부주의가 끔찍한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소방 검사는 단순한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었다. 건물 곳곳에 설치된 소방시설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꼼꼼히 살피고, 혹시라도 미비한 점이 있다면 신속하게 개선하도록 조치하는 일이었다. 화재 발생 시, 단 하나의 오작동도 인명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절박함이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날, 박 소방위와 김 소방교는 5층짜리 상가 건물의 소방 검사를 위해 나섰다. 1층에는 화려한 꽃들이 만발한 꽃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김 소방교는 꽃집 사장에게 건물 내 화재 수신기의 위치를 물었지만, 사장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모르겠는데요”라고 답했다. 꽃들로 뒤덮인 공간을 헤집고 겨우 찾아낸 수신기는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었고, 낡은 전선들은 거미줄처럼 엉켜 있었다. 정상 작동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김 소방교는 혀를 차며 건물 전체를 샅샅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복도에는 깨진 유도등이 흉물스럽게 매달려 있었고, 있어야 할 감지기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많았다. 스프링클러 헤드는 녹슬어 제 기능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만약 이곳에서 화재가 발생한다면, 대피 경로는 혼란에 빠질 것이고, 초기 진화는 불가능할 것이 뻔했다.


박 소방위는 굳은 표정으로 건물의 소방안전관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00건물 안전관리자님 되십니까? 저는 나주소방서 소방검사반 박정경입니다. 혹시 지금 어디 계십니까?”


수화기 너머에서는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곤해 죽겠는데… 무슨 일이슈? 나 지금 목포인데, 못 갑니다.”


박 소방위는 어이가 없었다. 안전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 이렇게나 무책임할 수 있다니. 그는 감정을 억누르며 차분하게 말했다.


“현재 귀 건물의 소방시설이 거의 작동 불능 상태입니다. 유도등은 깨져 있고, 감지기는 사라졌으며, 화재 수신기는 작동조차 안 됩니다. 지금 당장 현장으로 와주셔야 합니다.”


상대방은 박 소방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나 그 건물 곧 팔 건데, 신경 쓰지 마쇼.”


박 소방위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안전관리자가 해야 할 기본적인 의무를 설명하려 했지만, 상대방은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소방서가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래요? 맘대로 하쇼. 경찰도 아니면서… 나 잡아가려면 잡아가 보시든가.”

전화는 뚝 끊겼다. 박 소방위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김 소방교는 박 소방위의 얼굴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저런 사람이 다 있습니까. 안전불감증도 정도가 있지…”


수많은 건물을 점검해왔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법을 무시하고, 안전을 경시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돈이 사람 목숨보다 우선이라는 듯한 태도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두 소방관은 굳은 표정으로 소방서 문을 밀고 들어섰다.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 땀으로 흠뻑 젖은 근무복은 그들의 고된 하루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즉시 예방계장과 과장에게 상황을 보고하는 동안, 그들의 목소리에는 실망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특히 김 소방교는 마지막 '맘대로 하라'는 안전관리자의 오만함에 울분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보고가 끝나자마자, 박 소방위와 김 소방교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적발 보고서와 행정처분 서류 작성을 시작했다.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 서류 넘기는 소리만이 적막한 사무실을 채웠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위반 사항을 꼼꼼히 기록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무거웠다. 단순히 실적을 올리는 행위가 아니었다. 화재 예방이라는 최전선에서,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무책임한 태도와 싸워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들을 짓눌렀다.


이번에 적발된 건물은 노후된 소방 시설을 방치했을 뿐 아니라, 화재 감지기를 작동 불능 상태로 만드는 등 심각한 수준의 안전 불감증을 드러냈다. 만약 화재가 발생했다면 대형 인명 피해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서류 작업에 몰두하던 김 소방교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발신자는 평소 친하게 지내는 직장 선배, 최 형이었다.


"인수야, 00건물 소방 검사 갔다 왔냐?" 최 형의 목소리는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네, 형님. 갔다 왔습니다." 김 소방교는 짧게 대답했다. 최 형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 그 건물 안전관리자가 내 친구인데, 방금 전에 전화가 왔더라고. 무슨 일 크게 터진 거 같던데."


김 소방교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형님, 그 사람이 형님 친구십니까? 건물 소방시설이 엉망이라 몇 가지 지적 사항을 말씀드렸더니, 오히려 큰소리를 치면서 ‘맘대로 하라’고 하더군요." 그는 당시 안전관리자의 비웃는 듯한 표정과 건성으로 대답하는 말투를 떠올리며 더욱 분개했다.


선배는 잠시 침묵했다. 무거운 침묵이 전화선을 타고 흘렀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마치 죄인이라도 되는 듯 물었다. “…그래. 어떻게 진행할 거냐?”


김 소방교는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 건은 절대 봐줄 수 없습니다. 형님. 법대로 조치할 겁니다.


소방시설 관리는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그걸 지키지 않는 건, 국민의 안전을 외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소방관 전체, 나아가 소방이라는 조직 전체를 무시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씁쓸함이 묻어났다. 그는 선배와의 관계가 불편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원칙을 굽힐 수는 없었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은 시간, 한 남자가 음료수 박스를 들고 소방서 사무실로 어색하게 들어왔다. 얼굴은 창백했고, 어깨는 축 쳐져 있었다. 그는 잔뜩 풀이 죽은 표정으로 박 소방위와 김 소방교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00건물 소방안전관리자 OOO입니다.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그날은 제가 좀 정신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내일 당장 소방 공사를 진행하겠습니다. 관련 업체에 연락해서 최대한 빨리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안전관리자도 새로 선임해서 건물 관리를 철저히 하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발 이번 한 번만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그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리는 듯했다. 그는 자신의 안일함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지 깨달은 듯 보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모든 법적 절차는 이미 완료된 상태였다. 적발 보고서는 이미 상부에 보고되었고, 행정 처분은 되돌릴 수 없었다. 지금 와서 봐달라고 사정하는 것은,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으려는 것과 같았다.


박 소방위는 냉정하고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소방시설 유지 관리는 단순한 형식이 아닙니다. 소방안전관리자님의 의무이자,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안전 불감증은 곧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범죄 행위와 같습니다. 이미 모든 조치가 끝났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철저하게 관리하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남자를 향한 연민도 느껴졌다. 그는 남자가 이번 일을 통해 큰 교훈을 얻기를 바랐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에는 후회와 자책감, 그리고 앞으로 닥쳐올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무거운 침묵 속에 음료수 박스를 내려놓고 조용히 사무실을 나섰다. 굳게 닫힌 사무실 문 너머로, 그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박 소방위와 김 소방교는 한동안 굳은 표정으로 문을 바라봤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씁쓸함과 함께, 다시 한번 안전 의식 고취를 위해 더욱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이 자리 잡았다. 그들에게는 무너진 안전 의식의 벽돌을 하나하나 다시 쌓아 올려야 하는 무거운 책임감이 있었다.


소방시설의 유지·관리는 대한민국 '소방시설 설치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철저히 규제된다. 소방시설을 고의로 철거·폐쇄하거나 훼손하는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 그리고 소방시설 등을 스스로 점검을 하지 않는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 에 처해진다. 소방시설 점검은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하며,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징역, 벌금 또는 과태료가 부과된다. 소방시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경우, 시정 조치를 명령하고 이행하지 않으면 영업 정지 또는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이처럼 소방법이 엄격한 이유는 단 하나, 화재는 단 한순간의 방심으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소방관은 화재 현장에서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예방도, 법 집행도, 국민의 안전을 위한 숭고한 사명이다. 허술한 관리로 인해 화재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목숨을 걸고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소방관들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이 애초에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다.


박 소방위와 김 소방교는 이 사건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달았다. 소방시설을 방치하는 것은, 국민의 안전을 방치하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소방관들은 단호해야 한다. 법이 무시당하지 않도록, 국민의 생명이 위협받지 않도록,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의 앞에서 안타까운 희생이 반복되지 않도록.


소방관들은 오늘도 보이지 않는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다. 그 싸움이 화염 속이든, 법적 조치이든, 그들의 사명은 변하지 않는다.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숭고한 사명. 그들은 오늘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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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저 : 미래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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