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의 어느 소방서, 그곳에서 서인규는 그림자 같았다. 25년 가까운 세월을 묵묵히 화마와 싸워온 그는, 낡은 방화복처럼 닳고 해진 베테랑이었다. 그의 이름 석 자는 동료들 사이에서 훈장과도 같았다.
누구보다 먼저, 망설임 없이 화염 속으로 뛰어드는 그의 뒷모습은 전설처럼 회자되었다. 맹렬한 불길이 덮쳐오는 순간에도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춤추는 불꽃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꿰뚫어 보는 듯 날카롭게 빛났다.
그의 손길이 닿은 장비는 언제나 최상의 상태를 유지했다. 낡은 호스 하나, 녹슨 렌치 하나도 그의 손을 거치면 새것처럼 변했다. 묵묵히, 그리고 완벽하게. 그는 말이 없었지만,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곧 훌륭한 교범이었다. 서인규는 그렇게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왔다. 25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소방서 안에서 그는 활력 넘치는 동료이자 든든한 형님이었다. 계급 따위는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는 언제나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선배에게는 진심 어린 존경을 표했고, 후배에게는 아낌없는 격려와 따뜻한 조언을 건넸다. 출동 벨이 울리면 그는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망설이는 후배의 등을 떠밀며 "가자!" 외치는 그의 목소리는, 묘하게 안심을 주는 힘이 있었다. 궂은일은 늘 그의 몫이었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그는 늘 앞장섰다. "서 주임님만 있으면 든든하다"는 말은 그저 듣기 좋은 칭찬이 아니었다. 그의 존재는 동료들에게 굳건한 버팀목이자, 희망의 불씨와 같았다. 그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동료를 사랑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그의 땀방울이 스민 방화복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역사였다.
하지만 퇴근 시간만 되면 그는 종적을 감췄다. 회식 자리에는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고, 야유회는 언감생심이었다. "집에 일이 있다",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는 단골 멘트였다. 동료들은 반쯤은 농담으로, 반쯤은 진심으로 그를 짠돌이라고 불렀다. "투잡 뛰는 거 아니야?", "빈 박스 줍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 돈독이 올랐다니까." 딸이 셋이라는 사실은 그의 짠돌이 기질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변명이었다.
그의 행동은 미스터리였지만, 아무도 깊이 파고들려 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소방관으로서의 의무를 완벽하게 수행한다는 사실이었다. "좀 짠돌이 같으면 어때, 일만 잘하면 된 거지." 동료들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의 사생활에 무심했다.
어느 날, 서인규는 극심한 복통을 느꼈다. 처음에는 단순한 소화불량이라고 생각했지만, 통증은 점점 더 심해져갔다. 병원에서 내린 진단은 위암 말기였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그는 망연자실했다. 건강만큼은 자신 있다고 믿었던 그였기에 더욱 충격은 컸다.
고요한 새벽, 소방서 2층 대기실에서 서인규는 희미하게 밝아오는 창밖을 바라봤다. 웅크린 어깨는 밤새도록 짓눌린 고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했다. 그는 새벽 알람 소리보다 먼저 눈을 떴다. 암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온 후 그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소방서 동료들은 서인규의 투병 소식에 충격과 슬픔에 잠겼다. 평소 그의 냉철하고 강인한 모습만 봐왔던 그들은 그의 고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십시일반 성금을 모으고, 돌아가면서 병문안을 갔다. 평소 무뚝뚝했던 동료들은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화재 현장에서 들이마신 유독 가스 때문일까. 아니면 그간 쌓인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터진 걸까. 동료들은 서인규의 병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며 저마다 이유를 찾았다.
“그래도 서인규잖아. 저승사자도 혀 내두르고 도망갈 거야.”
농담처럼 던졌지만, 모두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는 늘 그랬듯, 이번에도 이겨내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올 거라고. 누구보다 끈질기고, 맷집 좋기로 소방서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이었다.
항암 치료 때문에 듬성듬성해진 머리를 모자로 가린 채, 서인규는 종종 소방서를 찾았다. 핼쑥해진 얼굴이었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금방 좋아집니다. 조금만 쉬면 다시 복귀해야죠.”
그 말에 후배들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고, 선배들은 애써 시선을 피했다. 괜찮지 않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병마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의 모든 것을 잠식해 들어갔다. 한때 강철 같았던 눈빛은 흐릿해졌고, 우렁차던 목소리는 작아졌다. 굳건했던 그의 걸음걸이는 비틀거렸고, 억지로 지어 보이던 미소는 점점 더 어색해져 갔다.
그리고 결국… 서인규는 54세라는, 너무나 젊은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났다.
장례식 날, 소방서에는 무거운 침묵에 짓눌려 있었다.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간신히 흐느낌을 삼켰지만, 결국 눈물은 멈추지 않고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누군가의 흐느끼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릴 때마다, 서인규와 함께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불길 속에서 동료를 구하던 그의 용감한 모습, 힘든 훈련 속에서도 잃지 않던 유쾌함, 그리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던 그의 듬직한 뒷모습까지… 그 모든 기억들이 가슴을 쥐어짜듯 아프게 밀려왔다.
침묵을 깨고, 누군가 나지막이 흐느끼듯 말했다.
“서 주임님… 평소답지 않게 왜 이러십니까… 그냥 툭 털고 일어나서 ‘나 괜찮습니다!’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하지만 이제, 그는 말이 없었다. 늘 묵묵히 모든 것을 감내하며 살아왔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무 말 없이 우리 곁을 떠났다.
동료들이 장례식장을 찾았을 때 생각지도 못한 모습들이 장례식장에 펼쳐졌다. 예상했던 동료들의 낯익은 얼굴 대신, 낯선 이들이 끝없이 줄을 잇고 있었다. 낡은 휠체어에 몸을 맡긴 노인, 위태로운 목발에 의지한 채 겨우 발걸음을 옮기는 어르신, 부모의 손을 잡고 연신 눈물을 훔치는 발달장애 아이들까지. 그 행렬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조문객들은 하나같이 떨리는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서 선생님이… 우리 아들, 평생 처음으로 따뜻하게 목욕시켜주셨어요.” “그 날, 폭우가 억수같이 쏟아졌는데, 병원까지 직접 데려다주셨지 뭡니까… 혼자서는 절대 못 갔을 텐데.” “명절 때마다, 심지어 생일까지… 잊지 않고 꼭 찾아와 주셨어요. 빈손으로 오신 적이 없어요.”
그제야, 동료들은 서인규의 ‘비번’이 품고 있던 진짜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에게 ‘비번’은 휴식이 아니었다. 그는 쉬는 날이면 늘 어디론가 바삐 사라졌고, 다음 날이면 어딘가 모르게 지쳐 보였다.
투박한 빈 박스와 구겨진 재활용품 봉투는 그의 낡은 1톤 트럭 뒷자리를 늘 차지하고 있었다. 동료들은 그가 폐지를 모아 용돈이라도 벌충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폐지들은 헌 옷과 잡동사니와 함께 고물상에 팔려, 모인 돈은 고스란히 장애인 단체의 기저귀 값과 병원비로 쓰였다. 퇴근하고 부터 시작된 장애인 목욕 봉사는 그의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을 새겼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철저히 숨겼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누구를 돕고 있는지,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조용히 다녀왔고,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같은 근무조였던 김 소방교는 굳게 다문 입술을 달싹이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턱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희도… 사실은 다 알고 있었어요. 서 선배를 짠돌이라고 놀리고, 회식 때마다 빠진다고 뒤에서 수군거렸죠… 죄송합니다. 그런데… 선배는 그 모든 걸 알고도 그냥 웃어넘겼어요. 오히려 저희를 걱정했어요. 피곤해 보인다고, 쉬어야 한다고…”
침묵을 깨고, 유족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늘… 그 사람은 늘 그렇게 말했어요.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는 거야. 굳이 설명할 필요 없어. 마음이 가는 대로 하는 거지.’ 라구요…”
장례식장은 검은 옷과 국화꽃 대신, 따뜻한 눈물과 후회의 한숨으로 가득 찼다. 화려한 조화 대신, 서툴지만 진심이 담긴 편지들과 아이들의 그림이 영정 사진 앞에 놓여 있었다. 사진 속 그는 특유의 순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진 앞에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지난 날의 오해와 무관심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는… 불길 속에서만 사람을 구한 게 아니었어요. 어둠 속에서도, 외로움 속에서도,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묵묵히 사람들을 지켜냈죠.” 누군가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장례식장을 가득 메웠다.
누군가는 영웅을 불꽃처럼 강렬한 존재로 기억하지만, 서인규는 마치 등불처럼, 은은하게 오래도록 타올랐다. 드러내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밝게 세상을 비추었다.
짠돌이. 투잡 의혹. 회식 불참. 그 모든 오해들은 결국 하나의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인규는 그 누구보다 국민을 위한, 진정한 ‘소방관’이었다. 제복 안에 감춰진 따뜻한 인간애, 말 없는 손길, 그리고 조용한 헌신...
진정한 소방의 의미는, 서인규를 통해 다시 쓰여졌다.
그는 이제 우리 곁에 없지만, 그의 정신은 여전히 남아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삶과 사람들, 그리고 그가 말없이 믿었던 ‘책임감’은 오늘도 후배 소방관들의 가슴속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영원히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숨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