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햇살이 쏟아지던 2020년 5월, 오후의 도심은 한가로워 보였다. 창밖 흰 구름은 유유히 흘렀지만, 소방서 내부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문연희 소방장은 벌써 세 번째 구급 출동을 마치고 돌아온 터였다.
교통사고 환자는 머리에 심한 타박상을 입은 중년 남성.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의식이 불안정해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었다. 앰뷸런스 내부는 고단했던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엉겨 붙은 먼지와 튄 핏자국, 땀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문 소방장은 마스크 안으로 무거운 숨을 삼켰다. 쉴 새 없이 울리는 무전 소리에 닳아버린 체력, 헬멧 안에서 땀으로 젖어 짓무른 뒷목이 따끔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세차 호스를 잡았다. 거친 물줄기가 앰뷸런스 표면에 엉겨 붙은 먼지를 씻어냈다. 물기를 닦아내자, 이번엔 소독액이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차량을 뒤덮었다. 내부는 더욱 꼼꼼하게. 바닥, 손잡이, 들것, 장비 하나하나 소독 티슈로 박박 문질렀다.
바이러스 감염 위험은 늘 도사리고 있었다. 완벽한 소독만이 다음 출동을 위한 준비였다. 동료 대원은 창문을 활짝 열어 퀴퀴한 공기를 내보내고, 다른 대원은 소모된 의료 용품을 빈틈없이 채워 넣었다.
차량 정비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그녀는 컴퓨터 앞에 앉아 쉴 새 없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환자 인계 기록 작성, 특이사항 보고. 꼼꼼하게 작성된 기록은 혹시 모를 의료 과실을 막는 중요한 자료였다.
동료들과 간단한 메모를 공유하고, 아까 전 출동에서 겪었던 아찔한 상황을 농담처럼 주고받으며 잠시 웃음꽃을 피웠다. 그제야 텅 빈 속에서 간절하게 점심 식사를 갈망했다.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간,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스테인리스 쟁반을 들고 배식대 앞에 늘어선 줄에 합류했다. 따뜻한 쌀밥, 구수한 된장국, 김치,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오징어채 볶음. 익숙한 메뉴들이었지만, 오늘따라 더욱 맛있어 보였다.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려는 순간, 긴장이 스르륵 풀리는 듯했다. 그녀는 깊은 숨을 내쉬며, 비로소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음을 느꼈다.
구급 출동! 영광군 법성면 00리, 임산부 복통!
귓전을 때리는 찢어지는 듯한 방송 소리에 문연희 소방장의 젓가락이 밥그릇을 쨍, 하고 튕겨 올렸다. 채 삼키지도 못한 밥알이 목울대를 간신히 넘어가자마자 반사적으로 몸이 튀어나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배식판은 식탁 위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옆에 있던 박 소방사와 김 소방장 역시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뒤따라 뛰어나갔다. 아침 부터 출동으로 뻐근한 어깨와 짓눌린 듯한 피로감이 덮쳐왔지만, 사이렌 소리는 묵직한 무언가를 짓누르며 본능을 일깨웠다.
임산부 복통. 방송 멘트에 위중함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단순한 소화불량이나 위경련일 수도 있지만, 39주라는 숫자는 모든 가능성을 긴박한 현실로 끌어당겼다.
진통의 시작일 수도, 태반 조기 박리 같은 응급 상황일 수도 있었다. 막달의 산모에게 1분 1초는 산소 마스크 없이 심해를 잠수하는 것과 같았다. 머뭇거리는 순간, 탯줄은 옥죄는 밧줄이 될 수 있었다. 문 소방장은 숨을 몰아쉬며 구급차 문을 박차고 올라탔다.
차량의 덜컹거림과 함께 장갑을 끼는 손길은 굳건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흔들리는 비상등처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평소보다 뜸한 차량 행렬이 오히려 초조함을 더했다. 귓가에 웅웅거리는 사이렌 소리가 뇌 속을 파고들 때, 무전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법성면 00리, 39주 산모! 양수 파수! 지금 아이가 나오려고 합니다!"
숨소리조차 멎는 듯한 정적. 문 소방장의 입술이 바짝 말라붙었다. '차내 분만 가능성… 준비… 해야 해…'
반사적으로 분만 키트를 낚아챘다. 멸균 장갑, 소독 거즈, 탯줄 클램프, 신생아 보온 포대, 석션기….문 소방장 손은 훈련된 대로 움직였지만, 머릿속은 톱니바퀴처럼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초산인가, 경산인가? 회음부 탄력은? 열상 대비는? 출혈량은 얼마나 될까? 아기… 아기 호흡이 늦어지면? 기도 확보는? 활력 징후는… 즉시 확인해야 해….'
간호대 시절부터 대형 병원 응급실에서 5년간 구르며 그녀는 수많은 생사의 갈림길을 지켜봤다. 침착하고 빈틈없다는 칭찬도 수없이 들었다. 하지만 병원 안에서는 숙련된 의료진과 완벽한 시스템이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있었다. 정해진 프로토콜 안에서, 그녀는 한 톱니바퀴였다.
하지만 119 구급대, 현장은 달랐다. 지휘도, 완벽한 매뉴얼도, 숙련된 의료진의 도움도 없었다. 오직 자신의 판단과 경험만이 유일한 지침이었다.
지금, 그녀의 어깨에는 산모와 뱃속 아기, 두 개의 생명이 얹혀 있었다. 좁고 덜컹거리는 구급차 안은 그 어떤 의사도 탐탁지 않아 할 최악의 분만실이었다. 하지만 문 소방장은 도망칠 수 없었다. 그녀는 119 구급대원이었다. 망설이는 순간, 늦는다. 바로 이곳이 그녀가 갈고 닦은 모든 지식과 기술, 그리고 뜨거운 마음을 쏟아부어야 할 전쟁터였다.
문 소방장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불안과 긴장감 대신 굳건한 책임감이 심장을 채웠다. 그래,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 환자와 태어날 아기는 눈앞에 보이는 화려한 대학 병원이 아니라, 바로 그녀의 손끝에 모든 운명을 걸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희미하게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할 수 있다. 해내야만 한다. 그녀는 대한민국 119 소방대원이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산모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에 누워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문 소방장이 황급히 산모의 상태를 확인한 결과, 이미 태아의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탯줄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고, 양수와 혈액이 섞인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병원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1시간 거리입니다. 여기서 분만해야 합니다!"
문 소방장의 목소리는 다급했지만,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상황 보고가 아닌, 자신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산모와 아이를 안전하게 지켜내겠다는 굳은 다짐이었다. 순식간에 구급차 안은 작은 분만실로 변모했다. 문 소방장은 능숙하게 분만 준비를 마치고 산모의 자세를 바로잡았다.
보호자는 불안한 표정으로 떨리는 손을 뻗어 산모의 손을 꽉 잡았다. 좁은 공간, 끊임없이 흔들리는 차체,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 모든 것이 열악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문 소방장을 비롯한 그 누구도 두려움에 휩싸이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직 산모와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만이 그들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마침내, 고통과 희망이 뒤섞인 짧은 시간이 흐른 뒤, 우렁찬 아기의 울음소리가 좁은 구급차 안을 가득 채웠다.
새로운 생명이,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바퀴 위에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산모는 감격에 겨워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갓 태어난 아기는 세상에 첫 숨을 내쉬며 힘차게 울어댔다. 문 소방장은 능숙하게 탯줄을 자르고, 꼼꼼하게 신생아의 몸을 닦아 체온을 유지하며 조심스럽게 아기를 엄마 품에 안겨주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의료진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문 소방장과 구급대원들은 산모와 아기를 안전하게 인계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조용히 현장을 떠났다.
소방서로 돌아온 그들은 미처 먹지 못한 차가운 점심 대신, 컵라면으로 허기를 달랬다. 하지만 허기보다 먼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한 생명을 무사히 세상에 맞이하게 했다는 기쁨은, 육체적인 피로를 순식간에 잊게 할 만큼 강렬했다.
며칠 후, 갓 태어난 아이의 아버지가 음료수 한 상자를 들고 소방서를 방문했다. 그는 문을 열자마자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날 문 소방관님과 구급대원분들이 아니었다면, 제 아내와 아이 모두 어떻게 됐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서 꼭 119 구급대원이 되게 하겠다며,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연신 감사의 말을 되풀이했다. 문 소방장은 따뜻한 미소로 화답하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굳이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날 구급차 안에서 아기가 힘차게 내질렀던 첫 울음소리가, 이미 모든 감사의 마음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예정되었던 따뜻한 점심은 차갑게 식어버렸고, 땀은 식을 새도 없이 계속 흘렀지만, 문 소방장과 구급대원들은 그 어떤 보상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생명을 지켜냈다. 그것은 그들의 숭고한 의무였고, 가슴 벅찬 자부심이었다.
소방관은 맹렬한 불길과 용감하게 싸우는 영웅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조용하고 헌신적인 마음으로 생명을 소중하게 품어 안는 따뜻한 손길이라는 것을, 그녀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출처 : 헬스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