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꺼낸 궁금증이 공부의 시작이다
“엄마, 저 기름은 무슨 꽃으로 만드는 거야?”
— 탐구력의 작은 문, 그 문을 열고 탐구를 넘어 탐험까지 아이들은 거침없이 자신을 넘어간다
"엄마. 저 기름은 무슨 꽃으로 만든 거야.? "
오늘 하도와 나는 부엌에서 호박전을 부치고 있었다.
달궈진 팬 위에서 노릇하게 익어가는 호박의 향,
지글거리는 소리, 따뜻한 기름 냄새.
그러다 하도가 카놀라유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엄마, 저 기름은 무슨 꽃으로 만드는 거야?”
무슨 꽃.
그 두 글자가 부엌의 소리보다 더 선명하게 내 귀에 들어왔다.
어른이 된 우리는
이미 경험하지 않은 영역에 대해서는 쉽게 질문을 멈춘다.
지식은 많아졌지만
궁금해하는 능력은 오히려 좁아져 버린다.
하지만 하도는 그 반대다.
세상은 아직 경계 없이 열려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의 들판이 넓다.
그래서 묻는다.
“무슨 꽃?”
어떤 꽃이기에 기름이 되고,
어떤 것은 또 기름이 되지 않는 걸까?
혹은 — 아이만의 상상으로는 —
세상 모든 꽃이 기름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무슨 이라는 단어 하나를 나의 아이가 뱉는 순간.
그 한 단어 속에 얼마나 많은 우리 하도의 가능성이 들어있는지가 나의 미소안에 담겨질때면
아이를 다이아몬드로 보기로 매순간 결정하고 또 결정하는 나의시선 끝. 저 멀리 이미 펼쳐진 하도의 꿈의 아련히 이미 보이는듯도 하다
‘무슨’이라는 작은 문
나는 그 단어에 오래 머물렀다.
“무슨”이라는 질문은
대상을 '이름'이라는 세계 안으로 데려오기 위한 작은 문이다.
아이는 이름을 알고 싶어 하며
세상을 분류하고 연결하고 확장한다.
그 과정 자체가 탐구력의 뿌리다.
그리고 사실 탐구력은
아이 바깥에서 주입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아이 안에 있다.
항상 조용히, 한쪽에서 반짝이며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가
“그건 뭐야?”
“왜 그럴까?”
하고 꺼내 볼 수 있도록,
그냥 들어만 주길 기다린다.
아이는 원래 질문하는 존재다.
탐구력은 원래 아이의 심장 박동처럼 안에서 계속 뛰고 있는 것이다.
아이의 상상은 언제나 현실 밖으로
하도는 내 대답을 듣자마자 자기만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꽃을 계속 때리면 물이 나오고,
그 물을 오래 두면 기름이 돼.”
나는 웃음이 났지만,
그 상상력이 너무 귀해서
틀렸다고 하지 않았다.
아이가 상상으로 만들어내는 설명은
사실 정답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자기 안의 세계가 어떻게 확장되는지 보여주는 과정이다.
그때 깨달았다.
엄마의 역할은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의 질문이 마음껏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것이라는 걸.
아이의 궁금증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순간,
엄마는 아이의 세계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말해준다.
“네가 궁금해하는 것들을 나는 언제든 들어줄게.”
“너의 질문은 언제나 환영이야.”
그 말 한마디 없이도,
아이에게는 엄마의 얼굴, 엄마의 눈빛, 엄마의 고개 끄덕임이
안정감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그 안정감이
탐구력의 날개가 펼쳐지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된다.
안전하다고 느끼는 아이만이
자기 안의 질문을 세상 밖으로 꺼낸다.
공부는 이렇게 시작된다
오늘 우리는 호박전을 만들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큰 일을 해냈다.
하도가 자기 안의 궁금증을 꺼냈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공부는
책상에 앉아 문제를 푸는 것보다
이렇게 부엌에서, 밥 짓는 사이에서,
아이의 마음속에서 반짝이는 하나의 질문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데서 시작된다.
“엄마, 저 기름은 무슨 꽃으로 만드는 거야?”
오늘 하도의 질문은
카놀라유의 원료를 묻는 듯했지만
사실은 세상을 알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을 향해 열린 엄마의 자리,
그 둘이 만나 만들어낸
아주 작은 기적 같은 공부였다.
그래서 나는 하도에게 말해주었다.
“오늘은 호박전도 만들고,
꽃이 어떻게 기름이 되는지도 함께 공부했네.
공부란 건 이렇게,
궁금한 마음 하나에서 시작되는 거야.”
부엌은 어느새 조용해졌지만
하도의 눈 속에는 새로운 세계가 하나 더 생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