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현기증. 감정들』 (W.G.제발트. 문학동네)
- 그는 특히,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일이 내 안에서 저절로 설명되고, 그럼에도 그 일들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더욱 수수께끼처럼 변해간다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199p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내 기억 속에 매우 선명하게 남아 있는 과거의 어떤 일들이 있다. 주로 강렬한 감정과 연결되어 있는 장면인데, 아픈 감정일수록 그 연결이 더욱 강력해서 잊고 싶어도 도무지 잊히지가 않는다. 잊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선명하게 각인되어 버린다. 흑백으로 지직거리는 과거의 화면 영상 속에, 그 장면만 컬러로 부각된다. 의지와 상관없이 여러 번 반복 재생되는 것이다.
- 과거의 기억이라는 것이 어느 부분에서는 회색빛 들판으로 이루어진 황량함이 전부다가, 또다른 부분에서는 장면들이 갑자기 그 스스로도 믿기 힘들 만큼 매우 이례적인 선명함을 띠고 떠오르는 것이다. 10p
그러다 문득 의심스러워진다. 이다지도 선명하게 내 기억을 지배하고 있는 그 장면은 얼마만큼 진실일까. (주로 타인이 포함된 그 장면에 대해) 내가 느낌 감정을 근거로 타인의 의도까지 해석해버린 과거의 일들. 그렇게 주관적으로 채색된 기억들은 실재하는 것일까, 먼 하늘에 떠 있는 구름 같은 것일까. 나의 시각은 때때로 편협한데, 그런 시각을 가지고 내가 보고 들은 것들도 결국은 나의 기억이 된다. 기억은 그렇게 계속해서 편향되어 간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런 기억의 편향성이 결국은 나의 정체성을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모든 사건들이 누구에게나 똑같게 기억될 수는 없을 것이다. 같은 시간 같은 곳에 있었어도 각자의 감정과 기억은 다를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어떤 장면에 대한 그림이나 사진은 아주 적은 사실밖에 말해주지 못한다. 아니, 때로는 상황을 왜곡하기도 한다. 특히 대부분의 그림이나 사진들은 아름다운 장면들을 주로 담고 있기에. 카메라를 들이대면 모두가 미소를 짓고 손가락 하트를 만들기에.
- 벨은 여행지에서 본 아름다운 풍경을 모사한 그림들을 사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런 그림들은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고유한 인상과 기억을 순식간에 장악해버릴 뿐 아니라, 심지어 완전히 파괴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3p
당신은 그 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내 기억 속 장면들이 당신에겐 아무 일도 아니었는지, 작고 사소한 일들이었는지, 어쩌면 내 기억과는 다른 방식으로 커다랗게 남아 있는지, 그 순간의 내 마음을 알았는지, 혹은 나중에라도 짐작하게 되었는지…. 때때로 알고 싶고,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알고 싶지 않다.
제발트의 <현기증. 감정들>은 기억과 감정에 대한 사유의 책이다. 스탕달이 주인공이었다가, 카프카가 주인공이었다가, 제발트 자신이 주인공이었다가, 그러면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데, 그것이 서사적인 결합은 아니고 의식의 흐름으로 결합된다. 그래서 이 독서일기 또한 의식의 흐름으로 쓰여진 것만 같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스탕달과, 카프카와, 제발트와, 그리고 역자인 배수아와 함께 존재했고 그 경험은 내 기억의 일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