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는 '관습'이 필요하다

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

by 오레오나오레오




영국 글로스터 지역에서는 휴일이 되면 색다른 대회가 펼쳐진다. 이른바 '치즈 롤링 페스티벌'. 진행자가 높은 경사의 잔디밭에서 치즈 덩이를 굴린다. 참가자들은 치즈를 쫓아 잔디밭 아래로 뛰어내려 간다. 높은 경사로 인해 뛰기보다는 구르는 경우가 다반사다. 서로 부딪치며 경로 없이 굴러다니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떠올리게 한다. 법과 질서가 없던 자연 상태의 인간은 그들과 유사하지 않았을까.


홉스는 '자연법', 평화를 지키고자 사회계약을 통해 스스로의 권리를 군주에게 이전한다고 했다. 현대 사회는 군주 대신 정부와 국회가 있다. 선거라는 사회계약을 통해 권리를 잠시 이전했기에 유사한 면도 있다. 그렇기에 협치를 통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고, 국가 중대사를 결정할 막중한 책무를 지닌다. 하지만 외람되게도 자연 상태와 다를 바가 없다. 전직 대통령은 불법 비상계엄을 선포해 특검으로부터 사형을 구형받았으며, 다수당은 집권 1년을 특검으로 점철했다. '권력'을 위해 대립하는 정부와 국회의 모습은 마치 '치즈'를 위해 충돌하는 참가자의 모습과 유사하다.


자연 상태의 원인을 두고 크게 두 가지 진단이 제기된다. 하나는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다. 권력이 한 개인에게 집중된 구조가 반복적 탄핵을 낳았다는 시각이다. 그러나 제도는 사회가 굴러가기 위한 일종의 틀이다. 합의를 기반으로 만들었기에 완벽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본고장 미국의 헌법은 본문과 27개의 수정 조항을 포함해 10페이지 내외다. 국가 구성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를 기반으로 추가 사항은 수정조항으로 때마다 추가했기에 허점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250년 간 대통령이 탄핵되거나, 독재로 향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지도자의 성향이 문제다'는 의견이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미국 대통령의 성향도 다양했지만 정치 시스템 전체가 자연 상태로 후퇴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핵심은 제도와 인간에 허점은 당연함에도, 그 허점을 매우고자 한 움직임이 없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필요한 것이 '관습'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 교수는 민주주의의 원동력으로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꼽았다. 정당이 다르더라도 국익을 우선시한다는 믿음. 권한을 자제해 상대와 동행하겠다는 의지가 허점을 보완했다는 것이다. 관습은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을 합의로 풀어낸 결과물이다. 남북전쟁 이후 재건의 시대를 거치며 극심한 자연 상태를 겪으며 얻은 교훈이 담겨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대법관 증원,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 등에서 권력이 선을 넘지 않도록 초당적으로 협력할 수 있었던 이유다.


반면 한국 정치에서는 충분한 관습이 형성되지 못했다. 정치적 경쟁이 곧 상대의 정당성 자체를 부정하는 구조로 굳어지면서, 제도적 권한은 최대치로 행사되고 자제는 미덕이 아닌 패배로 인식됐다. 이로 인해 제도와 인간의 허점은 반복적으로 노출됐고, 탄핵이라는 극단적 결과로 이어졌다.


그렇기에 정치의 자연 상태를 제도와 인간의 책임으로 돌리는 건 무책임하다. 두 차례의 탄핵을 제도 개편이나 특정 개인의 실패로만 치부하는 건 문제의 본질을 가린다. 답은 관습이다. 정치에 있어 제도는 인간의 이기심을 통제하는 최소한의 장치라면, 관습은 내면의 '공명정대한 제삼자'의 감시가 상시 작동하는 장치다. 치즈를 잡으러 굴러내려갈 때 서로 부딪치면 안 된다는 암묵적 관습이 있었다면 어쩌면 질서 정연히 내려가는 모습을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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