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타인의 색
나는 여전히 벽을 가득 채운 푸른 바다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파도는 살아 있는 듯 일렁였고, 그 물결이 내 가슴속 깊은 곳과 맞닿아 있었다. 그것은 분명 그림이었지만, 동시에 내 기억의 한 조각이었다. 나는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것은 차갑고 매끄러운 벽이었지만, 그 감촉 너머로 묘한 떨림이 스며들었다.
“보셨죠?”
아이의 목소리가 뒤에서 낮게 울렸다.
“당신의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색은 이렇게 살아나죠. 그리고 당신이 외면해 온 것들이 결국 이렇게 드러나게 돼요.”
나는 손을 거두며 고개를 떨구었다. 내 안의 무거운 기억이 다시 불러내진 것 같아 숨이 막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숨 막힘은 단순히 고통만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꽉 막혀 있던 것이 비로소 터져나가는 듯한, 묘한 해방감이 그 속에 섞여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당신만의 이야기가 있는 게 아니에요.”
미스터 Lee는 천천히 갤러리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작은 발걸음이 바닥을 울릴 때마다 은은한 파문이 퍼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자신도 모르게 숨겨온 것을 내어놓고 갔죠. 그리고 그들의 색은 지금도 이렇게 남아 있어요.”
나는 아이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 끝에 걸린 첫 번째 그림 앞에서 멈추자, 숨이 저절로 막혔다.
붉었다.
온통 피처럼 붉은 바다. 그 위로는 검은 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꽃잎은 바람결에 흔들리며 떨어졌다가 곧 사라졌다. 그 모습은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불길했다.
“이건…”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사랑을 잃은 한 남자의 이야기예요.”
미스터 Lee가 그림 앞에 서며 말했다.
“그는 매일 바다를 보며 기다렸죠.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발걸음을 떼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의 사랑은 붉게 피어났지만, 끝내 흑빛으로 시들어가고 있죠.”
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꽃잎이 바람에 떨어질 때마다 내 안에서도 오래된 상실이 흔들렸다. 그것은 분명 남의 이야기인데도, 내 고통과 겹쳐져 눈물이 차올랐다.
아이의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
“누군가에게는 이 붉음이 고통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끝까지 사라지지 않는 사랑이기도 해요. 모든 색은 그렇게 양면을 가지고 있죠.”
나는 눈을 떼지 못한 채 속삭였다.
“… 마치 내 안을 보는 것 같아요.”
미스터 Lee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작은 손을 들어 다음 그림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곳에는 분홍빛 안개가 자욱했다. 안개는 그림 속을 가득 메우며 흐릿하게 번졌고, 그 안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그림자들은 끝내 다가서지 못했다.
“이건 고백하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예요.”
아이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흘렀다.
“평생 곁에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마음을 말하지 못했죠. 그래서 색은 따뜻한 분홍빛이면서도, 안개처럼 잡히지 않아요. 닿고 싶지만 닿지 못한 마음이 이렇게 남아버린 거예요.”
나는 그림자 둘을 오래 바라보았다. 안갯속에서 손을 뻗는 듯한 그림자의 움직임은 애타도록 간절했지만, 동시에 절망적으로 멀리 있었다.
“만약… 그가 용기 내어 한마디라도 말했다면…”
내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 안개는 걷혔을까요?”
미스터 Lee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하지만 그는 끝내 말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 색은 영원히 분홍빛 안개로 남아버린 거예요.”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 안에도 닿지 못한 말들이 숱하게 쌓여 있었다. 그것들이 안개처럼 흩어져 아직도 가슴 어딘가를 짓누르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세 번째 그림 앞에서 나는 숨을 멈추었다.
회색이었다.
온통 잿빛으로 뒤덮인 캔버스, 그러나 그 한가운데 작은 불꽃 하나가 떨리듯 타오르고 있었다. 금세 꺼질 것 같았지만, 꺼지지 않고 끊임없이 살아 있었다.
“이건 어린 시절의 상처예요.”
아이의 목소리는 유난히 낮았다.
“그는 늘 혼자였고, 아무도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지 않았죠.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가 있었어요. 그 불씨가 그를 지금까지 살아가게 했던 거예요.”
나는 무심코 물었다.
“…그 불씨는 언젠가 커질 수 있을까요?”
아이의 가면이 내 쪽으로 천천히 기울었다.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이 내 마음을 꿰뚫고 들어오는 듯했다.
“당신이 보고 있잖아요. 이미 그 불씨는 작지만 누군가에게 닿고 있어요.”
나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그림 속 불씨는 너무도 작고 위태로웠지만, 동시에 꺼지지 않는 끈질김이 있었다. 그것은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갤러리 안은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는 단순한 정적이 아니라, 모든 색이 내 이야기를 기다리는 듯한 침묵이었다. 나는 알았다. 이곳은 남의 이야기를 보는 공간이 아니라, 결국 나 스스로의 이야기를 마주하는 곳이라는 것을.
그때, 아이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제는 당신 차례예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본 것처럼, 당신의 이야기를 더 깊이 들려주세요.”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그 순간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요동쳤다. 말하고 싶으면서도 두려운 기억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봉인해 둔 가장 깊은 상처가 서서히 스스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