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 또 다른 방문자
나는 매일 밤, 다시 그곳으로 끌려갔다. 낮에는 숨을 고르듯 평범한 일상을 살았지만, 밤이 오면 문은 어김없이 열렸다. 빛이 새어 나왔고, 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꿈과 현실은 점점 구분할 수 없게 되었고, 그 모호함 속에서 나는 차츰 두려움보다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그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한 공기와 향기가 나를 맞았다. 오래된 책의 냄새와 짠 바다 내음이 섞인 듯한 향기. 벽마다 걸린 그림들은 잔잔히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무언가 달랐다.
갤러리 안에,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그녀는 중년의 여인이었다. 긴 코트를 입은 채 벽 앞에 서 있었고, 두 손을 가슴께에 모은 채 떨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이미 굵은 눈물이 맺혀 있었고, 그림 앞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그 모습은 너무도 절절해서, 차마 다가가 목소리를 내기조차 어려웠다. 그 순간, 옆에서 미스터 Lee의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오늘은… 당신만의 밤이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이는 여전히 하얀 가면을 쓴 채였다. 그러나 오늘은 그의 목소리가 조금 더 무겁게 들렸다.
“저 여인도, 당신처럼 오랫동안 닫아둔 이야기를 안고 찾아왔어요. 이곳은 누구에게나 열리니까요.”
나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여인의 앞에 걸린 그림을 보았다.
그림은 눈부시게 검었다. 검은 장미들이 화면 가득 피어 있었는데, 장미는 피어나는 동시에 곧 시들어 흩날렸다. 그 위로 하얀 눈발이 내리고 있었고, 눈은 꽃잎 위에 내려앉자마자 녹아 사라졌다.
나는 그 순간 알았다. 이 그림은 단순한 장면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여인의 슬픔이, 고스란히 색으로 남은 것이었다.
여인의 목소리가 떨리며 새어 나왔다.
“내 딸은… 너무 빨리 떠났어요. 아직도 내 잘못 같아요.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조금만 더 가까이 있었다면…”
그녀의 말은 점점 흐느낌으로 이어졌다. 나는 그 소리에 가슴이 저릿하게 저려왔다. 그 말은, 어쩐지 내 말과 겹쳐졌다. “내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그날 내가 끝내 붙잡지 못했던 손길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손을 움켜쥐었다. 숨이 막혔다. 눈앞의 여인이 내 고통을 대신 울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미스터 Lee가 여인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작은 손이 여인의 손등 위에 포개졌다.
“그건 어머니의 잘못이 아니에요.”
아이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놀랍도록 깊게 울렸다.
“세상에는 우리가 막을 수 없는 일들이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지금까지 품어온 사랑은 결코 헛되지 않았어요. 그 사랑은 여전히 여기에 있고, 당신 딸의 색으로 남아 있잖아요.”
여인은 흐느끼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난 아직도 매일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어요. 아무도 듣지 못하는 이름을… 나는 포기할 수가 없어요.”
아이의 손길이 조금 더 세게 여인의 손을 감싸 쥐었다.
“포기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기억한다는 건 곧 살아 있다는 뜻이니까요. 하지만 죄책감과 사랑을 혼동하지 마세요. 죄책감은 당신을 무너뜨리지만, 사랑은 당신을 살게 해요.”
그 순간, 그림 속의 검은 장미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들어 떨어지던 꽃잎이 다시 봉오리를 틔우듯 되살아나고 있었다. 눈발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더 이상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포근한 빛이 되어 장미 위에 내려앉는 듯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눈물이 차올랐다. 내 가슴속 어딘가가 그녀의 슬픔과 겹쳐져 함께 울고 있었다. 여인의 절규는 내 절규였고, 그녀의 눈물은 내 눈물이기도 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나도 똑같아요. 나도… 끝내 지키지 못했어요. 그래서 아직도 그날에 갇혀 있어요.”
내 목소리에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지만, 그 안에는 이상하게도 위로의 빛이 어렸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은 다르지만, 고통은 같았다.
그 순간, 갤러리의 공기가 달라졌다. 벽에 걸린 그림들이 은은히 빛나기 시작했고, 색들은 서로에게 스며들며 잔잔한 울림을 만들었다. 마치 두 개의 상처가 나란히 놓이며, 함께 숨 쉬고 있는 듯했다.
아이의 목소리가 고요히 울렸다.
“보셨죠? 당신만 아픈 게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의 고백은 다른 이에게 닿아, 그를 위로하기도 해요. 이곳은 그렇게 서로의 색이 이어지는 곳이에요.”
나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이번의 눈물은 전처럼 나를 짓누르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와 고통을 나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를 처음으로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