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현실과 꿈
갤러리의 공기는 무너질 듯 뒤흔들렸다. 벽에 걸린 그림들은 하나같이 떨며 제각각의 색을 뿜어냈다. 붉은 바다와 분홍빛 안개, 잿빛 불씨와 푸른 파도가 서로에게 스며들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 중심에서 숨이 막혀왔다. 온몸이 떨리고, 심장은 파도처럼 요동쳤다.
“그만… 제발 멈춰요!”
나는 절규하듯 외쳤다. 그러나 파도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내 절규를 먹고 더 크게 일렁였다.
그 순간, 미스터 Lee가 내 손목을 잡았다. 작고 여린 손이었지만, 놀라울 만큼 단단했다.
“이건 당신이 만든 파도예요. 당신이 아직 꺼내지 못한 이야기 때문이죠.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세요. 파도는 당신을 삼키러 온 게 아니라, 당신을 데려가기 위해 온 거예요.”
나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날을… 다시 떠올릴 수 없어요. 난 여전히 그 바다에 갇혀 있어요. 매일 밤마다… 그 목소리와 그 손길이… 내 꿈을 파고들어요.”
말이 끝나자마자, 갤러리의 천장이 갈라지듯 흔들렸다.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 빛 속에서 어렴풋한 환영이 나타났다. 그것은 내가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그리워하던 얼굴이었다.
“괜찮아.”
환영의 입술이 움직였다. 목소리는 너무도 선명했다. 분명히 현실의 것이 아닌데, 내 귀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히 울렸다.
나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내 손은 허공만을 움켜쥐었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 아직도 난, 당신을 놓아줄 수 없어요. 당신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아이의 목소리가 파도 너머에서 울렸다.
“죄책감은 사랑이 남긴 그림자예요. 하지만 그림자가 있다는 건, 빛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해요. 당신은 아직 빛을 보지 못했을 뿐이에요.”
파도가 나를 삼키듯 휘몰아쳤다. 나는 그 안에서 몸을 맡겼다. 두려움과 슬픔, 사랑과 그리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숨이 막히는 듯했지만, 동시에 오랫동안 가슴을 옥죄던 무게가 조금씩 풀려나갔다.
그리고 눈을 떴다.
나는 차가운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방 안에는 낡은 커튼 사이로 아침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숨이 가빠왔다. 온몸은 젖은 듯 땀에 흠뻑 젖어 있었고, 눈가는 아직도 뜨겁게 젖어 있었다.
“꿈이었나…?”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손을 들어 올리자, 그 안에는 여전히 하얀 손수건이 쥐어져 있었다. 푸른 자수는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선명한 흔적. 그렇다면 그곳은 어디였던가. 현실인가, 환상인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차갑게 스며들었다. 골목 끝에서 바람결에 스치는 그림자를 본 듯했지만, 눈을 깜빡이는 순간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나는 매일 밤마다 같은 꿈을 꾸었다. 갤러리의 문이 열리고, 나는 다시 그곳에 서 있었다. 벽에 걸린 그림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미스터 Lee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돌아왔군요.”
아이의 목소리는 꿈속에서도 또렷했다.
“현실로 도망쳐도, 결국 당신은 여기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두려움과 안도 사이에서 떨며 그를 바라보았다.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낮에는 평범한 일상을 살지만, 밤이 오면 나는 다시 이곳으로 끌려왔다. 두 세계가 뒤섞이며 나를 잠식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반복은 나를 조금씩 바꿔놓고 있었다. 꿈속의 갤러리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낮의 나를 붙잡아주었다. “괜찮아.”, “넌 혼자가 아니야.” 그 말들이 현실의 고통을 버티게 해 주었다.
나는 점점 알게 되었다. 이 갤러리는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내 무의식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또 하나의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