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 정순왕후를 소환하다

꾸역꾸역, 그것으로 충분하다

by 청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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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셨나요?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나다. 다들 극장에서 한 번쯤 눈물을 훔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아직 그 영화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화 줄거리를 전해 들으면서 자꾸 다른 사람에게 시선이 멈췄습니다.

단종도 아니고, 그를 지키려 한 엄홍도도 아닌 — 정순왕후.

그녀의 이야기를 찾아보면서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단종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산후통으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아버지마저 일찍 죽자 열두 살의 단종은 왕세손이 되었고, 열여섯 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그때부터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작은아버지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고, 결국 단종은 왕위를 내어주어야 했습니다.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왕이 된 세조는 그것을 역모로 다스려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단종 또한 영월로 유배를 떠났고, 유배지에서 1년도 채 되지 않아 열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어린 아내가 있었습니다.

정순왕후. 그녀는 열다섯 살에 왕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궁에 들어온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노비로 강등되었습니다. 아버지와 가족은 멸족을 당했습니다. 동대문 밖 초가집에서 살면서 시녀 몇 명이 동냥해 오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살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시간이 흘러 세조가 그녀에게 먹을 것을 내려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순왕후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한 번의 거절이 그녀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그녀가 먹고살기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은 옷감을 염색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이 무너질 것 같은 날에는 낙산에 올랐습니다. 동쪽, 영월 방향을 바라보며 소리 내어 통곡했습니다. 죽은 남편이 있는 곳을 향해, 목이 쉬도록 울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산을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옷고름을 염색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이 오래도록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통곡하고, 내려오고, 염색하고. 통곡하고, 내려오고, 염색하고. 그 반복이 60년이었습니다.

단종은 유배지에서 1년 만에 죽었지만, 정순왕후는 그 이후로도 60년을 더 살았습니다. 세조가 어떻게 살다 죽는지 보았습니다. 세조의 자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다 보았습니다. 역사의 긴 강을 자신의 두 눈으로 끝까지 지켜보았습니다.

그녀가 버틴 건 대단한 신념이 있어서가 아니었을 겁니다. 거창한 목표가 있어서도 아니었을 겁니다. 책을 읽어 깨달은 것도, 스승이 있어 배운 것도 아닙니다. 그저 세조 일가가 어떻게 되는지, 내 눈으로 끝까지 보고야 말겠다는 그 마음 하나. 어쩌면 그것이 전부였을지도 모릅니다.

요즘 글공부를 하다 보면 이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의미를 찾아라. 가치를 부여하라. 내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라." 물론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의미와 가치를 찾아 살아가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하지만 정순왕후의 60년을 생각하면, 저는 그 말이 조금 다르게 들립니다.

그녀의 삶에 거창한 의미가 있었을까요? 가치를 부여할 여유가 있었을까요? 아마도 아닐 겁니다. 오늘 하루를 살았고, 그 하루가 쌓여 60년이 되었다고 봅니다. 권력을 위해 조카를 짓밟은 세조보다 모든 것을 잃고도 자신의 자리를 지킨 정순왕후를 더 오래, 더 따뜻하게 집니다.

저도 요즘 하는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짜증도 나고, 그냥 다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날들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고, 주변을 돌아보면 나만 제자리인 것 같고, 이게 맞는 건지 틀린 건지조차 모르겠는 그런 날들이요.

그런 날 저는 정순왕후를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나보다 훨씬 분통 터지는 일을 겪은 사람이입니다. 그래도 그녀는 낙산에 올라 실컷 울고, 다시 내려와 염색을 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저는 세조처럼 사느니 차라리 정순왕후처럼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보잘것없어 보여도,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져도, 꾸역꾸역 하다 보면 60년은 삽니다. 그 정도 살고 나면 누군가는 나를 평가하겠지요. 그 평가가 세조보다는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통곡할 일이 있으면 실컷 울어도 됩니다. 낙산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주차장 구석이든, 화장실 칸 안이든, 마음껏 울고 나서 — 다시 자리로 돌아와 오늘 할 일을 하면 됩니다.

꾸역꾸역.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 글을 쓰고 나니, 영화를 보지 않았는데도 영화를 본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은 것 같습니다. 글이 나에게 주는 힐링입니다. 그리고 그 힐링이, 오늘도 꾸역꾸역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닿기를 바랍니다.

평가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꾸역꾸역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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