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과 이별사이
토요일, 군대에 있어야 할 아들이 집에 왔다. 일요일에 복귀한다고 했다. 아들이 온다는 소식에 작은고모(둘째 시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밥 같이 먹자. 언제 시간 돼?"
아들은 일요일 점심이 좋겠다고 했다. 뭘 먹고 싶냐는 고모의 물음에 청량리에 있는 뷔페 '다이닝원'도 좋고, 동네 '배비장 숯불갈비'도 좋다고 했다. 그날 저녁, 고모에게서 문자가 왔다. 배비장으로 결정, 12시 30분까지 모이라고. 마침 내 생일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겸사겸사 가족 외식을 하자고 했다.
다음 날 12시가 되도록 일어나지 않는 아들을 깨워 삼육병원 앞 배비장으로 향했다. 테이블에 물컵과 물수건이 여덟 세트. 우리 자리였다. 자리를 잡고 앉아 있으니 시어머니, 둘째 시누이, 아주버님이 차례로 들어왔다.
고모는 들어서자마자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여기를 벗어날 수가 없어. 엄마가 이렇게 좋아하시니 다른 데 갈 수가 없다니까."
맞는 말이었다. 아이들 졸업식, 입학식, 생일, 가족 모임. 왜 맨날 여기냐고 하면서도, 결국 밥을 먹는 곳은 늘 이곳이었다. 특히 시어머니는 배비장을 유독 좋아하셨다. 숙주나물무침, 고사리, 도라지무침에 게장과 물김치까지. 오늘도 어김없이 한 상이 차려졌다.
종업원 아주머니가 숯불 뚜껑을 걷어내며 말했다.
"돼지갈비 8인분 가져오면 되죠?"
고모가 웃으며 물었다. "우리가 돼지갈비 시킬 줄 어떻게 알았어요?"
아주머니는 목소리를 낮췄다.
"오늘이 마지막 장사라서요. 오늘은 돼지갈비밖에 안 돼요."
순간,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아주머니에게로 쏠렸다.
"아니, 갑자기요? 이유가 뭐래요?"
아주머니는 검지를 입에 대고는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님이 몸이 좀 안 좋으신가 봐요." 그러고는 주변을 살피며 이곳에 감자탕집이 들어온다는 얘기까지 살짝 건네고 자리를 떴다.
시어머니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아프면 더는 못하지."
고모가 탄식했다. "큰일 났네. 이제 우리 어디 가냐."
우리는 8인분을 먹고도 모자라 2인분을 더 시켰다. 집에서 빵을 먹고 온 터였는데도, 마지막 돼지갈비라고 생각하니 고기를 더 먹어 두어야 할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바쁘게 다른 테이블을 오가면서도 남편이 부탁한 사진 한 장을 찍어주었다. '배비장 숯불갈비'라는 글자가 유리 벽에 새겨진 그 앞에서, 우리는 손으로 브이를 만들며 마지막 가족사진을 남겼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무언가를 남기게 만든다.
계산대에는 여사장님이 있었다. 굽은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고모가 말을 건넸다.
"이렇게 갑자기 문을 닫으면 사람들이 서운하겠어요."
여사장님이 천천히 대답했다. "손가락도 굽고 허리가 아파서, 이렇게 도망가듯 결정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요."
34년이었다. 하루도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 텐데 그 자리를 지켰다. 평일은 물론이고 토요일, 일요일도 쉬지 않고 이 한 자리를 지킨 34년. 처음엔 돈을 벌기 위해 시작했겠지만, 그 세월을 버텨온 건 결국 우리 어머니 같은 단골손님들 때문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서, 그 고마움에 보답하듯 몸이 힘들어도 문을 열었을 것이다.
나도 밖으로 나와 간판을 가운데 두고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이번이 군대 간 아들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첫 휴가를 마치고 떠날 때, 강변 버스터미널에서 훌쩍 버스에 올라타는 아들을 보며 한 번 안아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런데 이번엔 그때만큼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2주 뒤에 또 온다는 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별도 여러 번 하다 보니 조금은 익숙해진 것일까.
배비장도 그렇다. 늘 거가 있었기에 당연하게 여겼다. 없어진다고 하니 새삼 아쉽다. 있을 때는 몰랐던 것들이다.
하지만 그 아쉬움이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별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이별을 겪으면서 마음은 조금씩 단단해진다. 아들과의 이별도, 배비장과의 이별도, 결국 좋았던 시간이 있었기에 아쉬운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