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난 사람말고, 머물게 하는 사람

전국노래자랑과 한 번의 배려가 알려준 세상의 기준

by 청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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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돈 많고 권력 있고 똑똑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런 사람의 말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인다고 믿었다.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꼭 맞는 말도 아니었다는 걸 요즘 들어 깨닫는다.


그 계기는 전국노래자랑이었다.

일요일에 45주년 연말 결선 방송을 봤다. 왜 이 프로그램이 45년 동안 사랑받았는지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됐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무대에 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조건도 제약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대의 나온 사람들의 정제된 모습보다는 어설프고 엉뚱한 모습에 더 애정을 느끼는 건 아닐까.


예전에 우리 구청 강당에서 예심을 본 적이 있다. 아침부터 사람들이 몰려왔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도 있었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복도에서는 각자 노래와 춤을 연습했다. 예심은 퇴근 시간을 훌쩍 넘겨 저녁까지 이어졌다. 단상 위에 심사위원 셋이 앉아 있었고 번호가 불리면 반주도 없이 노래를 불렀다. 몇 소절이면 합격과 불합격이 갈렸다.

어떻게든 텔레비젼에 출현해 보겠다는 집념이 보였다. 합격하면 활짝 웃었고 떨어지면 얼굴을 찌푸렸다. 그 모습 자체가 하나의 구경거리였다. 단상 위에서는 참가자가 서고 단상 아래에서는 그들이 관객이 됐다. 아이도 어른도 조건 없이 참여했다. 전국노래자랑은 평범한 사람이 많은 사람 앞에서 노래를 하겠다는 결심 하나로 최선을 다해 볼 수 있는 무대였다. 하고자 하는 마음을 그대로 존중하는 자리였다.


아버지는 이 프로그램을 좋아했다. 일요일 점심을 먹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 출연자들의 재주에 웃었다. 나도 자연스럽게 그 옆에 앉았다. 결혼을 하고 나서 내 옆자리는 남편으로 바뀌었다. 매주 우리는 점심을 먹으면서 이 프로그램을 본다. 45년 동안 프로그램이 이어진 만큼 나도 나이를 먹었다.


이번 연말 결선은 특별했다. 각 지역에서 상을 받은 사람들이 다시 모였다. 화면에 등장하는 얼굴마다 기억이 났다. 아흔 살 할머니의 잔잔한 노래도 떠올랐고 독특한 춤으로 관객을 사로잡던 모자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들은 다시 이 무대를 위해 연습했을 것이다.

'대상' 수상자는 뜻밖이었다. 90킬로그램은 훌쩍 넘을 듯한 아주머니였다. 등장하는 순간부터 웃음이 나왔다. 머리를 치켜 올려 정수리에 묶고 초록색 가디건 아래로 스카프가 흘러내렸다. 허리를 돌릴 때마다 스카프는 살랑살랑 흔들렸다. 검은 타이즈는 굵은 다리의 윤곽을 그대로 들어냈다. 덩치는 컸지만 몸놀림은 요가 강사 만큼 유연했고 가슴에서 끌어 올린 목소리는 무대를 장악했다. 얼굴은 만화에서나 볼 수 있는 캐릭터처럼 친근했다. 눈과 입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아주머니가 움직일 수록 웃음이 나왔다. 이 아주머니과 같이 있으면 웃을 일밖에 없을 듯 했다.

나는 ‘인기상’을 예상했다. 결과는 ‘대상’이었다.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도 이유가 궁금했다. 노래만 보면 더 잘한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심사는 다른 기준을 보고 있는 듯했다.

아주머니는 수상 소감에서 말했다. 전국노래자랑 이후 목욕탕에서 팬클럽이 생겼고 길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했다. “아무것도 아닌 저에게 이렇게 큰 사랑을 주셔서 감사하다”고도 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웃음과 흥을 주는 사람이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 한마디로 공기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날 나는 알았다. 오늘 이 프로그램의 심사 기준은 노래를 잘 하는 것을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휘어 잡을 수 있는가가 기준이었다. 그러면서 세상이 원하는 기준도 변하고 있다는 걸 았았다. 세상은 이제 혼자 뛰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뛰는 사람을 원한다는 걸.


저녁에는 온라인 독서모임이 있었다. 여덟 명이 모여 각자 책을 읽은 소감을 나눴다. 8명이 40분동안 5분내 발표를 해야했다. 미예 작가는 호명이 되었지만 다른 작가들이 이야기를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순서를 여러 번 미뤘다.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고 자신이 더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독서모임 마무리 소감 발표에서는 정 작가가 미예 작가 배려에 고마움을 전했다.

모임을 통하여 나는 다른 작가님들이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알려주어서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껏 내 머리속에 남아 있는 기억은 미예 작가님의 배려하던 모습이었다.


세상은 더 빠르고 더 뛰어난 능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내가 보낸 하루 끝에 남은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보여도 사람을 웃게 하고 머물게 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하다. 지금의 세상은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한다. 잘난 사람으로 사느니 배려하는 사람으로 사는것이 세상과 더 친해지는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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