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ing >
장기와 체스의 큰 차이점 중 하나는 바로 ‘왕’ 또는 ‘킹’의 역할이다. 두 게임
모두 왕과 킹이 한 번에 한 칸씩 움직인다는 점은 같지만, 장기의 왕은 매우
수동적인 위치에 머문다. 장기에서는 왕이 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며, 말 그대
로 ‘궁 안의 왕’ 신세이다. 반면 체스의 킹은 한 칸씩 움직이는 건 같지만, 체
스판 전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
체스에서는 보통 폰(Pawn)을 1점, 나이트(Knight)와 비숍(Bishop)을 3점(폰
�개와 맞먹는 가치), 룩(Rook)을 5점, 퀸(Queen)을 9점으로 평가한다. 킹은
게임에서 잡히면 즉시 패배하기 때문에 점수로 환산할 수는 없지만, 실제 체
스 이론에서는 킹의 힘을 약 3.5점 정도로 보기도 한다. 실제로 체스에서 모
든 주요 피스들이 서로 잡히고, 끝내기(엔드게임, endgame)로 넘어가면 승부
는 누가 킹을 가장 잘 활용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킹의 움직임은 체스에서
가장 강력한 피스인 퀸과 유사하다. 다만 퀸은 한 번에 여러 칸을 움직일 수
있지만, 킹은 한 번에 한 칸밖에 움직일 수 없을 뿐이다.
왜 동양 장기의 왕과 서양 체스의 킹 역할이 이렇게 다를까 생각해 보았다.
실제 역사적 배경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중국이나 한국 같은 동양
역사에서는 창업군주를 제외하면, 왕이 직접 전쟁터에서 솔선수범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반면 유럽 봉건 사회, 예를 들어 십자군 전쟁 시기의 왕들은 기
사들의 우두머리이자 전쟁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지휘관 역할을 맡았다. 그래
서 체스의 킹이 전장 한복판에서 움직이는 존재로 반영된 것이 아닐까 싶다.
또한 동양 왕실에서는 내시(환관)를 두어 왕을 보좌하고 궁을 지켰다. 장기판
에서도 왕을 둘러싼 내시(혹은 선비)들이 함께 궁 안에 있다. 반면 서양에는
내시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체스의 킹은 홀로 움직이며 독자적인 역할을 수행
한다.
< Queen >
여왕(퀸)은 동양의 장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살벌한 전쟁터에 여성이 직접
나서는 것 자체가 상상하기 어려웠고, 고대 사회에서는 왕가의 여인들, 즉 왕
비나 공주들조차 전리품이나 수동적인 존재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점에서 체스에서 가장 강력한 피스인 퀸, 그것도 룩과 비숍의 움직임을 모두
합친 듯한 퀸의 존재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엘리자베스 여왕 같은 강력한 여성 군주가 있었고,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형식적으로나마 일부일처제가 확립되면서 ‘퀸’이라는 존재가 자
연스럽게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 체스가 처음 전래된 페르시아 방면
유목민 문화권에서는 남녀 차별이 그리 크지 않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아마존 여전사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며 전투하는 그리스 동
쪽의 유목 민족을 묘사한 것인데, 실제로 유목민들은 남녀 모두, 혹은 전 국
민이 전사였다고 한다. 이들은 근접전보다는 기동성과 활쏘기 실력에 의존했
기에 남녀 모두 전쟁에 능할 수 있었다. 이런 문화에서는 여성이 전쟁에서 뛰
어난 전사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이 때문에 페르시아에서 유럽으로 체스
가 전파될 때 강력한 ‘퀸’이 존재할 만했다.
그럼에도 내 생각에는 ‘퀸’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여왕을 뜻하기보다는, 함축적
으로 왕의 친위 부대, 혹은 현대식으로 치면 ‘수도 방위군’ 같은 최정예 부대
를 상징하는 기물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서양 체스의 초기 고대 버전에서는
퀸이 지금처럼 강력하지 않았다고 한다. 퀸은 가장 강력한 만큼 가장 아껴야
하는 피스이기도 해서, 경기 초반에 너무 일찍 내보내면 위험하다.
개인적으로 장기보다 체스가 더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퀸의 존재 때문
이다. 직선 뿐 아니라 대각선까지 모두 커버할 수 있는 퀸이 체스판에 있기에
극적인 장면이 많이 연출된다. 실제로 경기 초반에 너무 빨리 서로의 퀸이 맞
교환되어 퇴장된 경기는 지루하게 진행되다가 무승부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 Rook >
Rook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차(Chariot)’를 묘사한 기물이다. 현대식 탱크
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전차가 가장 강력한 무기 체계 중 하나였던 만큼, 체스
와 장기에서 모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장기에서는 ‘차(車)’가 여전히 가
장 힘센 기물이고, 서양 체스에서는 퀸에게 그 자리를 내주긴 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존재다.
실제로 대부분의 체스 게임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기물 중 하나가 바로 폰
(Pawn)과 룩(Rook)이며, 이를 ‘룩 엔드게임(Rook Endgame)’이라고 부른다.
룩은 직선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기물이다. 킹과 룩
만으로도 상대가 폰, 나이트, 비숍 같은 기물을 가지고 있어도 승리할 수 있
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룩은 힘이 세다. 특히 마지막에 킹과 룩 하나 만으로
킹만 남은 상대를 체크메이트 할 수 있지만, 나이트나 비숍 하나만 남으면 무
승부가 될 만큼 룩은 강력하다 (심지어 막판에 나이트 2개가 있어도 다른 피
스가 없으면 체크메이트가 불가능하다.).
< Knight and Bishop >
나이트(Knight)와 비숍(Bishop), 이 둘을 ‘보조 기물(마이너 피스, minor
piece)’이라고 한다. 반면에 퀸(Queen)과 룩(Rook)은 ‘주요 기물(메이저 피스,
major piece)’이라고 부른다. 당연히 나이트는 기사 계급을 의미하고, 비숍은
종교 계급을 상징하는 기물이다. 동양의 사원(템플)처럼, 서양의 수도원 역시
자체 영지를 갖고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었기에, 기사와 맞먹는 힘을 가진
비숍의 존재가 이해된다.
그렇다면 비숍과 나이트 중 누가 더 강력할까? 정답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It
depends)’이다. 열린 전장에서는 장거리 이동이 가능한 비숍이 강하지만,
서로의 폰들이 얽혀 복잡한 전쟁터에서는 상대 기물을 뛰어넘을 수 있는
나이트가 더욱 유용하다.
나이트의 장점이라면, 하나의 비숍은 체스판의 절반 색깔만 다닐 수 있지만,
나이트는 보드 위 모든 칸을 커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이트는 모든 체스
기물 중 유일하게 직선 이동을 하지 않고 다른 기물을 뛰어넘을 수 있는
독특한 움직임을 가진 피스이기에, 때로는 나이트의 ‘동시 공격(Fork)’이 매우
치명적일 때도 있다.
하지만 많은 플레이어가 비숍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특히 두 비숍이 함께
있을 때는 체스판 전체를 커버할 수 있어, 단순히 3점+3점=6점이 아니라 약
7점에 달하는 시너지 효과를 낸다. 끝내기에서는 나이트가 제한된 공간만
지배하는 반면, 비숍은 적절한 위치 선정으로 넓은 영역을 통제할 수 있다.
물론 상황에 따라 나이트가 비숍보다 더 유리한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가
흔하지 않아 ‘좋은 나이트, 나쁜 비숍(Good Knight vs Bad Bishop
Situation)’이라는 특별한 이름이 있을 정도이다.
< Pawn >
체스의 가장 큰 묘미 중 하나는 폰(Pawn)이 체스판 반대편까지 도달하면 ‘프
로모션(Promotion)’을 통해 퀸(Queen)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물론 퀸 외에
도 룩, 비숍, 나이트로 바꿀 수 있지만, 대부분은 가장 강력한 퀸을 선택한다.
그 여정은 결코 쉽지 않다. 상대편에 룩 같은 장거리 공격 피스가 남아 있으
면 폰 혼자 힘으로 전진하기 어렵다. 여러 폰이 협력할 수도 있지만, 보통 엔
드게임에 이르면 대부분의 피스가 사라지고, 킹과 폰 한두 개만 남아 있기 때
문에, 킹이 폰을 옆에서 보호하며 한 걸음 한 걸음 프로모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때 폰은 단순한 졸병이 아니라, 마치 아빠의 팔짱을 끼고 결혼식장에
입장하는 새신부처럼 연약하면서도 소중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반대
편 끝에 도달해 퀸으로 거듭난다!
프로모션의 임팩트가 너무 크기 때문에, 프로모션이 거의 확실시되는 순간 대
부분의 선수들은 여분의 퀸을 손에 쥐고 은근한 미소를 짓는다. 이는 ‘다음 수
에 새로운 퀸을 보드에 올릴 거다’라는 무언의 압력이다. 실제로 많은 엔드게
임에서 프로모션이 확실시되면 상대가 기권하는 경우도 있다.
폰은 오직 앞으로만 전진하기 때문에, 초반에 다른 피스들로 인해 앞길이 막
혀 있는 경우는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지만, 중후반에 앞길이 뚫리면 ‘패스드
폰(Passed Pawn)’이라고 불리며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패스드 폰을 막아 세
우려면 상대는 적어도 폰보다 더 큰 피스를 희생해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경
기 막판에 패스드 폰을 만들어내는 것이 승부를 결정짓는 핵심인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