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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세상 May 22. 2023

대륙을 횡단하다 (3)

  가띠노에서 밴쿠버까지 <김밥>을 타고

여행 닷새 째 되는 날이다.

민박집을 나온 우리는 동네 가까운 카페에 들러 간단한 요기거리와 커피를 샀다.

미국의 커피는 맛없기로 유명해 여행 중에도 나는 커피를 집에서 갈아가지고 와 아침마다 직접 내렸다.

그런데 이날은 민박집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냥 사 마시기로 했었다. 크게 기대하지 않고 첫 모금을 마시는데 이게 웬 일? 몬태나의 작은 동네 카페에서 이렇게 맛있는 커피를 만나게 될 줄이야.

맛난 커피를 홀짝이며 기분 좋게 다시 서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오늘 목표는 아이다호주의 포스트폴스Post Falls라는 곳으로 8시간 반 정도 걸릴 예정이다.

어제 잠깐 들린 루즈벨트 국립공원 덕에 내게 뭔가 관광을 시켜줬다고 흐뭇해진 토마가 오늘은 근처에 있는 엘로우스톤 국립공원도 보고 가면 어떠냐고 권한다. 

"글쎄... 가면 좋지만 얼마나 더 걸리는데요?"

9시간쯤 더 걸릴 것이라고 한다. 

"에이, 그건 무리지."

자기는 이미 가보았지만 정말 신기하고 외계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며 어머니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결국 딸에게 전화해 의견을 묻는다. 

이성과 감정이 충돌해 결정을 내리기 힘들 때 토마가 선택하는 방법이다. 

합리적인 딸이 토마에게 결정을 내려준다.

엄마가 거길 가봤으면 하긴 한데 오늘은 너무 무리야. 다음에 기회를 만들자고.

몬태나의 산악지대가 끝없이 펼쳐진다. 

둥근 구릉들이 창밖으로 스쳐가고 암벽과 너른 들판이 번갈아 나타났다 사라진다. 

차는 헬레나산Helena MT 국유림 지대로 들어선다. 

길이 경사가 심해진다.

토마의 구호가 시작된다.

"할 수 있어요, 김밥!" "힘내요 기임~밥"

노쇠한 김밥이 응원에 힘입어 가까스로 고지를 넘었다.

토마가 다리에 쥐가 날 것 같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흔한 크루즈 운행도 안 되는 김밥을 하루 10시간씩 닷새 째 액셀을 밟아가며 운전을 하고 있으니 아무리 코끼리 다리라도 탈이 났을 것이다. 

헬레나시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헬레나는 몬태나의 주도이다. 한때 금광이 발견되어 주도가 버지니아시로부터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 땅에도 원래 여러 원주민의 나라Nation가 있었다. 그런데 1700-1800년대 광산이 발견되면서 찾아 들어온 백인들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겼다.

우리가 찾아간 식당은 1803년에 문을 연 유서 깊은 패밀리 레스토랑이다.

가족과 함께 외식을 하러 온 사람들로 꽤 붐볐다. 원주민의 후손이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다.

토마는 버거 정식, 나는 타코 샐러드를 시켰는데 잠시 후 나온 음식을 보니 기가 질렸다.

셀리의 컨츄리 카페                                                                   토르띠아 볼에 담겨 나온  타코 샐러드


맛보다 양으로 승부하는 집 같았다. 아니면 원래 이 정도는 먹는 사람들일 수도 있지.

토르띠야는 기름에 튀긴 것이 어마어마하게 커서 남은 샐러드와 함께 그날 저녁과 그다음 날 아침까지 내 식량이 되어 주었다.

헬레나에서 3시간 정도 더 달려 하우간산Haugan MT을 넘는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 길가에 <50,000개의 은화> 광고 현수막이 계속 나와 호기심이 동했다.

유명한 휴게소인 모양이다. 잠깐 들러보기로 했다.

그 이름이 유래한 건 은화로 장식된 술집에서부터라고 한다. 

예전에 그 술집을 세운 주인장이 술집 안 천정을 은화로 장식했는데 손님들이 하나씩 은화를 기증하면서 은화 1000개의 술집이 되었다가 5000개의 술집으로, 다시 5만 개의 술집으로 이름이 바뀌었단다. 벽이 온통 은화로 장식된 특이함으로 관광객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이 술집의 단골들은 대부분 광부들로 당시 그들은 임금을 지폐가 아니라 은화로만 받았고 은화를 넣는 주머니가 무거워 처지자 작업복 바지에 멜빵을 달아 입었다고 한다. 멜빵이 그렇게 시작되었다는데 이 동네에서 떠도는 얘기이니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은 동전이 8만 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대를 이어 술집을 운영하고 있는 여주인은 이 동전들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며 여전히 기증한 사람들의 것이고 이름이 다 적혀있다고 한다.

선물가게는 반짝이는 광석들로 만든 기념품들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광산촌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원목으로 만든 의자나 가구들도 있다.


휴게소를 떠나 2시간 정도 더 달리니 아이다호와 워싱턴주의 경계에 있는 포스트폴스에 도착했다. 

민박집에 짐을 풀고 저녁으로 먹을 음식을 사 왔다.

요즘은 누구나 어떤 동네에 어떤 음식이 유명하고 어떤 식당이 좋은지 검색하고 찾아다니는데, 먹는 걸 좋아하는 토마가 처음 온 동네의 유명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리 없다. 

나도 점심을 거의 채소와 튀긴 빵으로 먹은 지라 뭔가 단백질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등갈비 바비큐와 돼지고기찜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주문받는 사람의 추천을 따라 돼지찜pulled pork을 시켰다.

나물스튜(?)는 괜찮았는데 돼지찜pulled pork은 너무 건조해 맛이 없었다. 양이 엄청 많았다.

고기를 너무 많이 먹은 탓에 소화불량으로 토마는 밤에 잠을 편히 자지 못했다고 한다.

역시 맛 보다 양으로 승부하는 집


마지막 날 아침 한 시간을 벌었기 때문에 6시에 출발해도 충분히 잘 수 있다고 해서 6시에 출발하기로 했다.

집이 가까워지자 한 시라도 빨리 도착하고 싶은 모양이다.

시애틀까지 4시간 반, 거기서 밴쿠버까지 3시간 남짓 걸린다.

워싱턴주로 들어서자 창밖 풍경이 차츰 푸른색을 띠기 시작한다.

들판도 푸른색이 군데군데 보이고 멀리 보이는 둥근언덕들도 붉은색과 녹색이 섞이기 시작했다.

너른 들판에서 한가하게 놀고 있는 검은 소들을 보며 너희들 팔자가 상팔자다 했다.

미국에 백만이 넘는 노마드들이 편히 쉴 한 뼘 땅을 갖지 못해 자동차에 살림살이를 싣고 산과 들을 떠돌고 있는데 너희는 곧 죽을 운명일지라도 사는 동안만큼은 아무 스트레스 안 받고 그리 행복하니 참 좋겠구나 싶다.

며칠 동안 드넓은 땅을 지나왔는데 국유림을 제외한 대부분의 들판에 철책이 세워져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아마 야생동물을 보호하기 위한 철책도 있을 터이지만 많은 땅이 소를 먹이기 위한 초지로 사용되는 것을 보았다. 인간이 소고기를 얼마나 먹어대길래 이 넓은 땅에서 소 먹일 풀을 길러야 하는 것일까?

누군가는 이 넓은 땅을 소유하고 그 넓은 땅을 고기를 먹기 위한 소들의 방목지와 초지로 사용하고 있는데 누군가는 밤에 맘 놓고 몸을 뉘일 땅 한 뙈기가 없어 이 나라 저 나라, 이 땅 저 땅을 헤매고 있는 현실의 모순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옛날에 본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톰 크루즈가 원하는 땅-물이 있는 땅-을 차지하기 위해 야생마를 타고 힘차게 달려가 깃발을 꽂는 장면이다.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주연으로 나온 영화였는데 광대한 서부와 동부를 잇는 철로공사가 한창이고,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새 희망을 찾아 신대륙으로 몰려들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영화에서는 이 사람들에게 정착할 땅을 공짜로 나눠주는 행사가 나온다.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힘껏 말을 달려 원하는 땅에 깃발을 꽂으면 그 땅을 차지하게 되는 장면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미국에서는 1862년 링컨 대통령의 서명으로 홈스테드법Homestead Act이 발효되었다.

자영 농지법이라고도 불리는 이 법은 농사를 짓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서부의 미개척지를 약 160 에이커(20만 평)까지 무상으로 주는 법이었는데, 누구나 마음에 드는 땅을 골라 깃발을 꽂고 그 땅에 정착하여 5년이 지나면 토지소유권을 인정해 주었다. 물론 그 땅은 대부분 원주민들에게서 무력으로 빼앗은 땅이었다.

1862년부터 1986년까지 160만 명의 자영농이 토지를 증여받았고 그 면적은 3억 에이커(대한민국의 12배), 미국 총면적의 12%에 달한다고 한다. 이들이 미국 중산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 서부 미개척지 대부분의 땅에서 원주민이 추방되고 카우보이라고 불리던 노마드형 목축업자들도 자유로이 드나들던 땅에 소유권이 설정되고 철책이 세워지면서 농장형 목축업에 자리를 빼앗기게 된다.


오는 동안 내내 넓은 들판 드문드문 고립된 주택들을 보면서 여기서 사는 것이 꽤 외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상시에 달려와 줄 이웃도 멀고 경찰이나 병원도 멀고...

스스로 무장해야 안전함을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도 얼핏 들면서 땅과 물을 차지하기 위한 개척시대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이들의 총기소유를 정당화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독실한 기독교인들의 땅이 되었을까? 

인간이 절로 작아지고 안전하게 의지할 존재를 찾게 만드는 황무지와 언덕들로 둘러싸인 땅.

여행하는 동안 지나가는 지역의 라디오 방송을 여러 번 들었는데 놀랍게도 모두 목사의 설교나 상담, 낙태에 대한 청취자들의 비난 등 기독교의 교리에 대한 내용이 항상 방송되고 있었다.

기독교가 아닌 방송은 전화로 운영하는 벼룩시장 같은 프로그램을 한 번 들었을 뿐이다. 

오래된 자동차나, 도자기, 피클병들을 방송국 전화를 통해 파는데 물건 소개와 가격, 자신의 연락처를 남기는 프로그램이다. 대한민국에서 농촌의 개인 농민들도 인터넷 판매망을 갖추고 물건을 소개하는 사진도 올리고 전국적으로 직접 연결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미국의 중서부 지역이 현대적 인터넷망을 기반으로 한 정보의 교환과 이용에서 얼마나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는가를 실감할 수 있다.

또 하나 놀라웠던 것은 부활절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문을 닫은 가게나 식당이 한 곳도 없다는 사실이다.

독실한 기독교도들의 땅인데 부활절을 축복하는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는 식당이나 카페가 한 군데도 없이 모두 장사에 바쁜 모습들이다.

토마가 말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좋아해요."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미국은 부활절이 공식 휴일이 아니란다.     


                    

몬태나의 구릉

그런데 '기회의 땅'에 와서 뜨거운 땡볕아래 비지땀이 흐르는 노동과 청교도적 생활로 미국의 부의 원천을 이룬 이 농장의 주인들이 이제 도시의 기업가나 금융자본가들에 비해 상대적 결핍과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미국의 주류사회를 대변하는 

기성 정치인들에게 반기를 들었지만 대신에 어느 모로 보나 사기꾼 기질이 농후한 부동산 재벌 트럼프 같은 인물을 자신들의 대변자로 여기고 있다는 것 또한 이해하기 쉽지 않은 현상인 것 같다.

특히 이들이 가지고 있는 소수인종에 대한 혐오감과 이민 노동력에 대한 반감의 원인이 단순히 사회경제적 이유로 설명이 될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몇 개의 주 경계선을 넘는 동안 단 한 명의 흑인도 아시아인도 만나지 못했다.

직접 만나고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편견, 차별의 근거는 무엇일까?

자신과 다른 인종에 대한 불신과 증오라는 전염병을 종식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백신은 직접적인 접촉과 교류라는 브라이언 헤라교수의 글이 생각났다.


시애틀에 들어서자 비가 제법 내리기 시작했다. 

빈 주차장을 찾아 겨우 차를 세우고 유명한 딤섬 전문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맛은 있었지만 3판을 시켰는데도 양이 너무 적어서 토마는 여전히 배고프다고 했다.

비가 오고 피곤하기도 해서 시애틀 구경은 다음으로 미루고 바로 밴쿠버로 향했다.

이번에는 아무 탈없이 쉽게 국경을 넘었다.

밴쿠버로 가는 길은 봄기운이 완연했다.

이른 봄꽃들이 길가에서 우리를 반겨주는 듯하다.

드디어 대륙의 서쪽 끝 바다가 보이는 곳에 다다랐구나.

반가운 딸의 얼굴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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