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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세상 Jun 24. 2023

영초언니와
아버지의 해방일지

6월 민주항쟁을 기억하며

6월이 지나가고 있다.

35년 전 6월, 전두환 정권에게 호헌철폐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외침이 전국 곳곳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었다.

최루탄과 백골단의 방망이를 피해 다니며 수많은 학생과 노동자, 시민들이 전국 곳곳에서 매일같이 목이 쉬도록 구호를 외치며 길거리를 누볐다.

내 고향친구, 운동권도 아닌, 순하기만 했던 그 친구도 시청 앞 광장 어딘가에서 백골단의 몽둥이에 머리를 맞아 피가 흐르는지도 모르는 채 구호를 외치며 길거리를 헤매었다고 했다.

그 친구는 그해 6월 9일 최루탄에 맞아 죽은 이한열과 같은 학교를 다녔었다.

그때보다 9년 전 6월에 나는 영등포 경찰서 정보과 사무실 소파에서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는 창밖을 바라보며 검찰 송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발동 이후 그렇게 많은 학생이 감히 광화문 한 복판에서 독재타도와 유신헌법 철폐를 외치며 뛰어다닌 것은 처음이었다.

깜짝 놀란 경찰은 무자비하게 시위대를 잡아 닭장차에 실었다.

그런 만큼 체포된 학생들도 많아 서울시내 모든 경찰서에 10-20여 명씩 나누어 수용하고 조사를 진행했다.

조사도 오래 걸렸고 죄질 정도를 훈계석방과 30일 이내 구류, 구속의 세 등급으로 분류하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나는 3주 정도를 경찰서 정보과 사무실 소파에서 먹고 자며 지냈다. 

그렇게 오랫동안 잡아놓는 것은 물론 불법구금이었지만 그때는 아무도 그딴 것을 따지는 건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나는 결국 맨 마지막까지 남았다.

음력 6월인 내 생일상도 그곳에서 어머니가 정성 들여 싸 온 삼단 찬합으로 받았다.

6월이라는 생각을 하자, 그 끈적한 장마와 어떻게든 나를 등급을 낮춰 구속은 면하게 하고 싶어 했던 초등학교 동창이라던 형사와 나를 남겨두고 하나씩 떠나가던 다른 친구들의 어두운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

물론 하루도 빠짐없이 2시간씩 버스를 타고 나를 보러 오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는 희미해진 듯했던 젊은 날의 기억이 새삼 생생하게 떠오른 것은 오래전 6월에 머리가 깨졌던 그 친구에게서 어제 받은 문자 때문이다.

     

     평생 영혼을 갈아 넣으며 산 것 같은데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이 지랄 맞은 세상에 지랄 떨고 사는 것도, 

     괜찮은 것처럼 애써 웃으며 사는 것도 이제 너무 힘들어 그만 살고 싶다.

     세상이 너무 악취가 나서 견디기가 힘들다.


평생의 사랑인 남편이 있고, 부모를 존경하는 잘 성장한 아들과 딸을 둔 내 친구, 여고시절엔 참 우아하고 조용하고 음전했던 친구는 부조리한 세상과 싸우며 사는 동안  말 많고 거칠고 투쟁적인 사람이 되어갔다. 


지난겨울 남편의 유해를 안고 한국에 갔었다.

그를 추모하러 온 그의 후배가 자신이 기획해 출판한 책 두 권과 <영초언니>라는 책을 주고 갔다.

제주 올레길을 복원한 서명숙기자가 썼고 문학동네에서 출판했다.


영초언니는 내게는 마음 한 구석에 박힌 가시 같은 존재다.

내가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는 소식을 알렸을 때 선배들이 1년 전에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 기억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영초언니의 소식을 전하며 한번 찾아가 보라고 했다. 혹시 너를 기억하고 기억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지 않느냐며. 

오며 가며 인사는 많이 나눴지만 직접적으로 함께 일한 적은 없었기에 나는 내가 선배의 기억력 회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가서 만난 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겠는가.

게다가 새로운 환경에 아이들을 정착시키고 나도 남편도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느라고 여유 있게 휴가 한 번 갖지 못하는 생활 속에서 선배는 마음 한 구석에  조용히 묻어두었다.

이민 오기 전에 이미 소문으로 접했던 정문화 선배와의 이혼과 문화선배의 비극적인 죽음.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한 영초언니의 몸부림.

가혹한 폭행과 구금에도 버텼던 선배의 마음과 몸이 한국사회의 무자비한 자본주의적 법칙에 적응하느라고 무너져가기 시작했다.

결혼하고 아들을 낳고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한 현실과의 싸움에서 서서히 무너지고 병들어가는 것을 모두들 보고 알면서도 어쩌지 못했다.

어쩌면 주변에서 들었던 영초언니에 대한 얘기들은 바로 나의 얘기가 될 수도 있는 고통스러운 것들이었기에 그저 묻어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영초언니의 '빛났던 '청춘시절로, 또 나의 '빛났던' 시간의 기억들로 나를 이끌었다.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며 모여서 공부하고 투쟁의 계획을 세우고 

잡히면 무자비한 폭행과 고문도 감수해야 했던 그 시절을 우리는 '빛나는 청춘'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

어떤 두려움도, 주머니에 동전 한 푼 없어도 가슴속의 열정과 희망의 불빛을 끌 수 없었기에 

그때 영초언니는 빛나는 존재였다. 

내 친구도, 나의 선배들, 후배들 그리고 나도... 우리 모두 빛나는 청춘을 살았었다.


지금 내가 그 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가는 것은 서작가가 책의 서두에서 소개한 정혜신 박사의 설명 그대로의 이유가 맞는 것 같다.

정혜신 선생에 의하면 심리학에 [주둔군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군인이 전투를 치르다가 어려울 때면 통상 가장 어려운 전투를 치렀던 고지로 후퇴한다.

     그 이유는 그곳에 가장 많은 주둔군을 두고 왔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생에서도 어려운 고비를 넘길 때 심리적 주둔군을 많이 남기게 되는데 

     다시 어려운 일을 겪으면 그때를 떠올리며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리워하는 건 따뜻한 볕이 들던 시절이 아니라 

     바람이 몹시 불던 어떤 날인지도 모른다고.


패자가 다시 일어설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 무자비한 한국 자본주의체제와 사람에 대한 희망을 수시로 짓밟는 폭력적인 사회, 뭔가 나아지리라는 역사의 진보에 대한 기대감을 거침없이 비웃는 권력을 가진 자들의 횡포,

거기에 무비판적으로 호응하는 대중의 비합리성, 편견, 폭력적 공격...

지금의 한국사회가 이젠 국외자가 되어 어느 정도 보호막을 친 내 마음조차 사정없이 찌르고 벤다.

그래서 아마도 더 지독했던 권력의 무자비한 폭력과 싸웠던 그 시절, 함께 했던 사람들이 간절히 떠오르는지도 모르겠다.


<영초언니>를 읽기 두어 달 전에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었다.

빨치산 출신 아버지를 둔 작가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아 장례를 치르면서, 

찾아온 조문객들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짐짓 외면했던 혹은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모습들을 깊이 들여다 보게 되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을 반추하면서 아버지와 내면의 화해를 하는 과정을 그린다.

작가는 냉정하고 때론 냉소적이다할 만큼 사회주의자 아버지의 일상을 꾸밈없이 보여준다.

때문에 빨치산 출신 사회주의자의 딸로 살아야 했던 작가의 지난 세월이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녀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한 번 선택으로 겨우 3-4 년을 빨치산으로 살았고 그 후 평생을 감시와 제재를 당하며 살아야 했던 사람. 이십 년 가까이 옥살이를 하고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초짜 농부가 되었다. 

그의 젊은 날의 선택은 자신의 삶만이 아니라 다른 가족과 친척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연좌제에 묶인 조카의 앞날을 막았고 딸의 혼인도 포기하게 만들었다.

사회주의자로서는 근사할 수도 있었지만 농부로서는 젬병인, 의식만 가득 앞선, <새농민> 잡지에만 의존해 농사를 짓는 아버지를 어머니는 [문자농사]를 짓는다고 비웃었다.

그래도 끝까지 사회주의자로 살고자 했던 아버지는 민중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기꺼이 그들에게 이용당해 주었다. 

    

     오죽허면 그러겄는가.

    자네도 빨치산 출신 아닌가. 인민을 돕는 일에 그리 잔소리를 해야 쓰겄는가.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아버지를 불러내고, 그 부름에 농사고 집안일이고 다 팽개치고 내 돈 들여가며 도우러 나서는 아버지가 못마땅해서 잔소리를 하는 아내에게 그가 던지는 한 마디이다. 

비록 자신의 이력 때문에 딸은 물론 동생, 조카들이 사회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회복하기 어려운 정신적 타격을 입었어도 아버지는 끝까지 사회주의자로서의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민중에 대한 사랑을 거두지 않았다.

나는 한 때 자신의 세계의 전부라고 할 만큼 사랑했던 아버지가 조직재건 활동 때문에 감옥에 간 후 그 아버지에게 느꼈을 딸의 배신감이나 원망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 조차 할 수 없다. 

40대가 되어 아버지의 장례를 준비하면서 비로소 딸은 아버지와 다른 사람들의 관계를 통해서, 또 어렸을 적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면서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버지에게 미안함을 전하고 마음속으로 화해를 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 나는 행복했다.

물론 잘나고 똑똑했던 한 청년이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해방정국의 모순을 참을 수 없어 사회주의자의 길을 택하고 그 때문에 빛나던 한 청년과 그의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들이 가슴을 저리게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행복했다.

그에게는 비록 이념은 다르지만 매일 만나 투닥거리는 어릴 적 친구 박 씨가 있었고, 빨치산 동지로 만나 결혼하고 평생을 함께 한 아내가 있었고, 지극한 사랑을 베풀 딸이 있었기에, 그리고 끝내 그 딸과 화해로 막을 내린 해피엔딩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자본주의적 사회주의자' 농부의 기가막히면서도 한 없이 진지한 이야기들을 읽는 동안 내 얼굴엔 가끔씩 작은 미소가 어렸다. 


학도병으로 징발되어 지리산 빨치산 토벌대로 참전했던 아버지의 친구 박 씨는 제 형과 누이들이 어쩌면 자신이 쏜 총에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회한을 안고 평생을 살았다. 

역사의 질곡 속에서 가해자일 수도 피해자일 수도 있는 박 씨는 왜 독재정권 아래서 아직도 교련선생 따위를 하고 있냐는 아버지의 힐난에 이렇게 물었다.

 

         자네 하염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역사의 격동 속에서 무력함과 회한으로 점철된 시간이 아무렇게나 어서 흘러가기만을 하염없이 견디고 있는 삶들이 어디 박 씨만이었을까.

아버지의 동생도, 큰 집 오빠도, 실패한 빨치산 동지들, 어머니도 어쩌면 아버지도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는 그저 하릴없이 역사의 무게를 견뎌내야만 했을 것이다.


사람은 모두 흙에서 태어났고 죽으면 그저 흙으로 돌아간다고 믿은 철저한 유물론자였던 아버지는 오직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으로 그 험난한 역경을 견뎌내고 맞섰다고 했다.

영초언니는 더욱더 자본주의화된 한국사회, 내성적이지만 뛰어났던 아들에게 가해지는 학교폭력(교사와 동급생의)의 현실에 한국사회에 대한 믿음을 버렸다고 했다.

서울대 3대 천재 중의 하나로 불리었던 정문화 선배는 민청학련 사건의 다른 동지들이 정치인으로 혹은 사회단체 대표로 유명해질 때 거처할 곳도 없이 번역거리를 얻어들고 이리저리 떠돌다 삶의 기대를 버리고 고갈되어 갔다.

35년 전, 그 6월 희망으로 불타올랐던 나와 친구들은 20년 뒤, 혹은 25년, 30년 뒤 각자도생, 살아남느라 바빴다.

진지전에서 돌격대로 선봉에 섰던 어떤 사람들은 공을 인정받아 훈장도 받고 진급도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일상의 삶으로 돌아갔고 어떻게든 그 생활에 적응하고 뿌리내린 사람도 많을 것이다.

또 어떤 친구들은 현실과 화합할 수 없는 가치관을 버리지 못해, 무자비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한 무능력자로 스스로를 규정하며 마음과 몸이 병들어 가기도 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해피앤딩이 허락되지 않은 또 다른 천영초, 정문화들을 기억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내 마음속 진지에는 영광과 승리의 기억이 아니라

여리고 섬세해서 상처받고 부서지기 쉬운 몸과 마음을 가졌던, 

젊은 날의 순수함을 버리지 못해 주변과 적당히 화해하고 둥글둥글 사는 것이 어려웠던,

그래서 가족들마저 불행하게 하고 자신을 떠나게 만들었던,

종국에는 혼자 남아 병마와 싸우다 외로운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그런 사람들의 기억이 더 남아있다.


한국사회에는 이제 완전히 다른 비전이 필요하다고 누군가 말했다.

2008년 이후 신자유주의의 허상이 세계의 지식인들에게 확인된 뒤 아직 세계는 어떤 비전을 가지고 전진해야 할지 안개 속이라고 한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지난 10여 년간을 역사적 퇴행기라고 부르는 철학자도 있다.

과학과 신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그에 부응하는 새로운 경제적, 정치적 질서를 어떻게 세울 것인지 아직 아무도 분명한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는 일어나는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일들이 언론에 보도된다.

시위를 하던 노동자의 머리가 곤봉에 깨져 피를 흘리는 장면,

다시 서울 시내에서 최루가스가 터지고 물대포가 쏘아질 수도 있다는 보도.

정권에 불리한 내용이 보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행되는 언론과 국민에 대한 공공연한 위협과 탄압.

역사는 어디까지 퇴행할 수 있는가.

아니 우리 사회는 다시 진보의 길로 나갈 수 있을까.

한국사회의 전진을 이끌 세력은 과연 있는 것일까.

얼마만큼의 희생을 다시 치러야 하는 것일까.

온갖 생각이 마음속을 휘몰아친다.


진보를 위한 투쟁에서 똑같이 헌신했고 그 과정에서 혹은 그 결과 부상을 입거나 병들거나 낙후된,

이제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 잊혀진 그 이름들이 

오늘의 나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나의 진지에 남겨둔 친구들이다.

그 이름과 얼굴들을 기억하며 6월의 제단에 부끄러운 이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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