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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세상 Jun 17. 2023

자이온 캐년

자연의 품 속으로 들어가다

브라이스 캐년에 도착한 다음날 우리는 예정에 없던 일정을 추가했다.

국립공원 입구에서 받은 안내 팸플릿에 캐피톨 리프Capitol Reef 국립공원을 소개하는 내용을 보고 내가 욕심을 내어 동생을 설득했다. 

캐피톨 리프 국립공원을 둘러보는 것은 이미 짜인 일정 상 어렵지만 그곳까지 가는 12번 도로를 한번 달려보고 싶었다. Scenic Byway 12로 알려진 이 길은 유명한 드라이브 코스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왕복 5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여서 아침 일찍 출발해서 다녀오면 오후에 브라이스 캐년에서 남은 구경을 하는데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가는 내내 가끔씩 들판에 우뚝 솟은 건축물 같은 바위산이 나타나고 고지대로 오르면 발아래 다 깎이고 부서져 붉고 하얀 민둥머리 같이 부드러운 들판이 펼쳐진다. 

점점 고지대로 오르면서 산은 험해지고 길 옆의 숲이 짙어졌다.

볼더Boulder산에 들어서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제법 빗살이 거세게 창을 두드린다. 

 

갑자기 눈앞에 하얀 숲이 나타났다.

자작나무 숲이다. 

위도가 높은 북미대륙 북쪽에서만 볼 수 있는 자작나무를 미국 서부여행 중에 만나게 되다니. 

자작나무 숲 아래 아직 하얗게 남아있는 눈의 흔적들.

고도가 높은 탓에 이곳은 아직도 눈이 다 녹지 않은 것이다.

빗속에 창밖으로 스쳐가는 하얀 자작나무 숲이 미국 서부의 건조한 사막지대가 아니라 북유럽 어느 산길을 여행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여행 중 또 다른 여행을 하는 것 같은 환상이 들었다.       

아마도 기온이 낮고 비나 눈이 상대적으로 많아서 위도가 높은 추운 동네에 사는 이 나무들이 여기 사는 모양이다.       


캐피톨 리프 국립공원에 가까워지자 붉은색의 

암초들이 갖가지 모양을 하고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나하나가 신기해서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웠다.  

실컷 눈호사를 한 후 다시 볼더 마운틴을 넘어 브라이스 캐년으로 돌아가는 길은 마치 처음 가는 길인 듯 새롭고 신기했다.


물이 풍부한 서부의 산-자이온 캐년Zion Canyon은 서부의 다른 캐년들과 첫인상부터 달랐다. 

마치 한국의 설악산에 온 듯 푸르고, 하이킹 코스 한쪽으로 흐르는 작은 계곡의 물이 시원스럽다.

브라이스 캐년에서 자이온 캐년으로 가는 길은 드넓은 황무지와 바위 산들을 감상할 수 있는 전형적인 서부의 벌판을 가로지르지만, 가까워질수록 강우량이 상대적으로 많은 지역으로 가고 있다는 인상을 확실히 준다. 

군데군데 나타나는 아름다운 마을들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녹색의 나무들로 싱그럽다.

지난 일주일 동안 검푸르다 못해 짙은 회색을 띠고 있는 사막성 키 작은 덤불 식물과 마른 침엽수 잎들만 보았던 우리는 갑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연녹 색의 포플러 나무들, 연보라 색 꽃을 피운 푸른 라일락 나무가 주는 황홀하고 부드러운 색감에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경작지는 여전히 목초지로 쓰이고 있지만 가끔씩 과일나무들이 나란히 줄 선 밭도 보이고 지금은 말라있지만 우기가 되면 작은 물길이 옆으로 흐를 듯한 개울도 보였다. 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땅들은 물론 모두 백인들이 차지하고 그들만의 마을이 세워졌다. 반면 원주민들은 물도 없고 나무도 없고 사냥감도 없는 척박한 땅으로 쫓겨나 살고 있다는 현실에 마음이 아프고 화도 났다. 

브라이스 캐년에서 자이온 캐년으로 가게 되면 자이온 마운틴 카멜 하이웨이를 지나야 한다. 이 길은 말 그대로 높은 산 사이로 고속도로를 내어 양옆으로 펼쳐지는 암벽들을 굽이굽이 돌아나간다. 곳곳에 차를 멈추고 암벽과 평원들을 감상할 수 있는 작은 전망대들이 있다.

높은 암벽들 사이를 돌다 보면 자이온 캐년 국립공원의 동쪽 입구로 들어가는 터널이 나온다. 일방통행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푸른 신호가 들어올 때까지 차들을 줄 세운채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암벽 사진들을 찍느라고 바쁘다. 터널을 빠져나오면 역시 눈앞에 펼쳐지는 거대한 암벽들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여태까지 본 다른 캐년들이 위에서 밑으로 내려다보는 식이었고 직접 계곡 아래로 내려가 보는 것이 어려웠다면 자이온 캐년은 협곡의 바닥에서 위로 솟아오른 암벽들을 감상하면서 드라이브도 하고 하이킹도 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다른 캐년에서 본, 그림이나 사진을 보는 듯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이기까지 하던  풍경이 바로 눈앞에, 걷는 길 옆에 펼쳐지는 생생함이 눈과 마음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스프링데일 마을에 있는 호텔에 체크인한 후 해가 많이 남아있어서 워치맨 트레일을 걷기로 했다. 

그런데 국립공원 안 주차장으로 들어가려 하니 차들이 서있는 줄이 너무 길다.

포기하고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워치맨 트레일은 다음날 아침 일찍 가기로 했다.

좀  이른 저녁을 먹고 해지는 걸 보러 자연박물관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곳에 차를 세우고 공원 안내센터까지 이어지는 파루스Parus 트레일을 걸었다. 

버진 강을 옆으로 끼고 평탄하고 잘 정돈된 트레일 옆으로 사막성 덤불과 꽃들이 군데군데 피어있다. 

낮시간에 북적대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시원해진 바람과 물소리를 즐기며 트레일을 걷고 있다.

방문객 주차장 옆에는 캠핑족들을 위한 주차장이 따로 있다. 그곳뿐만 아니라 국립공원 안 여기저기에 캠핑장들이 있다.

이곳이 유난히 캠핑족에게 인기가 있는 이유는 자명했다. 

서로 다른 풍경과 특징을 가진 트레일 코스가 많고 강이 있고 숲이 있다는, 건조한 지대에서 보기 드문 장점들을 많이 가진 국립공원이다. 우리도 만약 다시 찾는다면 이곳에서 지내는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할 것 같다.

서쪽으로 지는 해의 빛을 받은 자이온 캐년의 봉우리들이 황금빛으로 빛난다.

마음이 평화로웠다. 고요해졌다. 

낮에 느꼈던 더위 그리고 차와 사람들이 만들어 낸 북적거림과 소란이 모두 자취를 감추고 오직 나와 산과 바람과 석양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고요함 속에 잠겨 들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산봉우리들을 보며, 버진강의 힘찬 물소리를 들으며, 가끔은 마주 오는 사람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며 우리는 자연의 품에 폭 안긴듯한 행복감을 만끽하며 한 시간 정도를 걸었다. 

비로소 관광객이 아니라 자연 속에 들어와 자연의 일부가 된 듯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워치맨Watchman 트레일로 향했다.

전 날 걸었던 파루스 트레일에서 옆으로 이어지는 워치맨 트레일은 관광객들에게 널리 알려진 트레일은 아니지만 숨겨진 보물 같은 하이킹 코스라는 어떤 관광안내인의 설명을 읽고 한 번 가보기로 했다. 

파루스 트레일이 걷기에 너무 편한 길이었기에 우리는 워치맨 트레일도 비슷하겠거니 생각하고 지팡이를 차에 그냥 두고 왔다. 

그런데 웬걸! 

걷기 시작한 지 한 10분쯤 지나자 계단과 경사가 번갈아 나타나며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고도는 112m 밖에 안 되는 워치맨 타워까지 트레일 코스로는 5.3km. 

암벽 둘레로 난 좁은 길을 굽이굽이 돌며 계속 올라가는 길이다. 그래도 사실 아주 힘든 코스는 아니다. 도중에 다리 한쪽에 깁스를 한 중년 여인이 한 손으로 지팡이를 집고 올라가는 것도 보았다. 다만 우리는 계단이나 바위를 오를 때마다 차에 두고 온 지팡이를 못내 아쉬워했다. 여행하는 동안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는 날을 빼곤 거의  매일 2만 보가 넘게 걸어서인지 며칠 전부터 무릎이 고장 나서 약을 바르고 달래며 하이킹을 하고 있는 처지였다.

워치맨 트레일은 머리 위로 드리운 암벽 밑으로 난 좁은 길을 걸으며 협곡의 속살을 그대로 보고 만질 수 있는 코스이다. 

바위가 굴러 떨어질 염려가 있으니 멈추지 말고 계속 전진하라는 경고가 세워져 있는 곳도 있다.

이곳은 그랜드 캐년, 브라이스 캐년과 더불어 지진이나 갑작스러운 융기 등으로 지층이 무너지고 뒤섞이지 않은 채 원래의 모습 그대로를 관찰할 수 있는 세계 유일한 지역이라는 그랜드 스테어케이스Grand- Staircase의 일부이다. 

형성된 시기로 보면 세 캐년 중 중간에 속한다고 한다. 

땅이 지나 온 시간을 서로 뚜렷이 다른 색깔과 무늬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는 즐거움과 함께 워치맨 트레일에서는 이제까지 사막여행을 하는 동안 만났던 모든 식물과 꽃들을 거의 다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물론 이곳에서 처음 본 말할 수 없이 예쁜 작은 들꽃들도 많이 볼 수 있다. 

절벽을 덮은 얄팍한 흙에 뿌리를 내리고 피어난, 작지만 섬세하고 약해 보이지만 강인한 들꽃들이 수없이 발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보며 경탄의 말을 속삭이게 한다. 

정말 예쁘구나. 

정말 장하구나.

왜 이곳을 숨은 보석이라고 칭했는지 알 것 같았다. 

                                                                                         

길 옆 혹은 머리 위, 발아래 암벽의 무늬와 거기 

매달려 핀 꽃들을 감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트레일

끝을 알리는 소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그곳에 서서 

내려다보니 스프링데일 마을과 공원 안내소

주차장이 저 아래로 보인다. 

그 주변을 각기 다른 모습과 색깔로 위용을 뽐내는 거대한 

산들이 둘러싸고 있다.

워치맨 트레일에서 내려오자마자 캐년 안으로 들어가는 셔틀을 타고 리버사이드 워크Riverside Walk 트레일이 시작되는 곳으로 갔다. 

캐년 안으로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셔틀은 9군데의 트레일 코스가 시작되는 곳마다 정차해 사람들을 태우거나 내려준다. 

리버사이드 트레일은 셔틀이 운행하는 노선의 가장 끝에 있는데 우리는 그곳에서 시작해 다시 공원 주차장까지 내려오는 방식으로 계곡을 즐기기로 했다. 

리버사이드 트레일은 휠체어도 접근할 수 있는, 딱 우리 취향에 맞는 트레일로 바로 옆으로 둥근 자갈이 깔린 강이 시원스럽게 흐르고 있다. 이 트레일에서 강을 건너면 네로우The Narrow라는 유명한 하이킹 코스가 있지만 지난겨울 많은 눈이 와서 강물이 불어 현재는 폐쇄되었다고 한다. 

강 군데군데에서 강물이 휩쓸고 지나가며 남긴 나무의 뿌리와 줄기들이 자갈들과 함께 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버진 강의 침식과 퇴적 작용으로 인해 자이온 캐년은 지금도 계속 모습을 바꿔가고 있다.

강 옆 돌출된 바위 위에서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편의점에서 사가지고 온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고 다시 셔틀을 타고 두 정거장을 내려가 그로토The Grotto 트레일을 걸었다. 

그로토 트레일은 평탄하지만 가끔씩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길이어서 걷는 게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다. 길 옆으로는 강아지풀 비슷한 식물이 들판을 뒤덮고 있어 마치 가을 남쪽 어느 들판을 걷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로토 트레일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에메랄드 풀 트레일 등 여러 다른 트레일로 연결되는데 이미 세 곳의 트레일을 걸은 우리는 거의 기진한 상태로 공원 주차장행 셔틀에 몸을 실었다. 버스 창밖으로 올려다 보이는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산들에게 아쉬운 작별인사를 보냈다.


거대한 협곡 속에서 마주했던 수억 년 시간, 강과 비와 바람이 빚은 잊히지 않을 풍경들, 트레일을 따라 걸으며 만났던 수없이 많은 작은 생명들, 아름다운 들꽃들, 그리고 자연의 품속에서 느낀 마음의 평화와 행복감.


이 모든 것과 더불어 꼭 기억해야 할 생명의 소중한 모습들이 있다.

흙이 다 씻겨 나간 채 벼랑 끝에 서있어도 삶을

지속하고 있는 나무, 물기 하나 찾기 어려운 

모래땅에 뿌리내리고 곱디고운 꽃을 피워내는 

생명력 강한 식물들.

그 덤불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살고 있는 도롱뇽과

아메리칸 팔콘과 이름 모르는 작은 새들.

인간이 지구의 지배자로 등장한 이후 인간에 의해 멸종된 수많은 생물들을 기억하며 

이들의 삶이 최소한 인간의 작용에 의해 중단되는 일은 없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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