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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세상 Jun 09. 2023

브라이스 캐년-돌로 쓴 시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그랜드 캐년을 떠나 앤틸롭Antlelop 캐년으로 향했다.

앤틸롭 캐년은 그랜드 캐년과 같이 애리조나 주에 있는데 나바호 원주민 지역이다.

이곳을 보려면 페이지 Page라는 작은 도시에서 원주민 가이드 관광을 신청해야 한다. 

아침 9시경 네 명의 원주민 관광 안내원이 네 대의 오프로드 트럭에 관광객들을 태우고 붉은 흙먼지가 날리는 거친 황야를 30분 가까이 달려 캐년 입구에 도착했다.

들판 한가운데에 작은 동산 같은 언덕과 그 아래쪽에 캐년이라기보다 굴로 들어가는 듯한 입구가 보인다.

한 팀씩 안내인의 설명을 듣고 캐년으로 들어가는데 먼저 들어간 팀이 더 안 쪽 장소로 이동할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벌써 뜨거운 태양이 얼굴과 등과 다리를 사정없이 태운다.


왜 이름이 앤틸롭 캐년이라고 붙여졌는지 계곡 안에 들어와서야 깨달았다.

좁은 천정을 향해 삐죽삐죽 솟아난 사슴의 뿔 같은 형상을 한 암벽이 휘둘러가며 올라간다.

천정에서 내려오는 햇빛이 암벽의 서로 다른 색깔의 무늬, 삐죽하게 돌출된 다양한 모양의 벽을 비추며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빛의 향연을 경험하게 하였다.

안내원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의 표지에 등장한 장면과 똑같은 장면이 나오는 지점을 가리키며 모두들 예술사진을 찍어보라고 권한다. 심지어 작품사진을 찍기 위한 장소와 각도를 알려주며 관광객 한 명 한 명마다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였다. 우리 자매도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중국인? 일본인? 묻다가 한국인이라는 대답을 하자 "아름답다"라는 한국어 찬사와        

함께 셔터를 눌렀다. 그 덕에 동생은 나중에 

거금(?)의 팁을 자의로 털렸다.

이 캐년은 주로 빗물이 빚어낸 작품이라고 한다. 

매년 6월에서 9월까지 이 지역은 우기가 되는데 

이때 내리는 비가 캐년 안으로 소용돌이를 치며 

들어왔다 흘러나가면서 이처럼 형이상학적인 암벽 건축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또 빗물이 소용돌이를 치며 흐른 물결무늬가 암벽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그 기간 동안 캐년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되지만 대체로 하루 이틀이면 물이 다 빠진다고 한다.                                   

                                        

캐년 안에서의 사진 찍기가 끝나고 안내원을 따라 캐년의 위쪽 들판을 잠시 걸었다. 이 들판 밑에 캐년이 있다. 저 사진의 언덕에 뚫린 작은 구멍이 캐년을 비추는 빛의 향연의 원천인 듯 싶다.

안내원이 나바호 여인들이 머리도 감고 화장수로도 썼다는 우윳빛의 야카꽃을 보여줬다. 우리네 옛 여인들이 사용한 청포꽃 비슷한 효능을 가진 식물인 모양이다. 사막의 상징 선인장도 화려한 분홍빛 꽃을 피우고 있다. 차로 애리조나 황야를 가로지르는 동안 들판을 뒤덮고 있어 가장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오렌지 빛 꽃도 드디어 아주 가까이서 만날 수 있었다.

페이지에서 초밥으로 저녁을 먹었다. 

사막에서 초밥이라니... 뭔지 모르게 떳떳지 못한 느낌이었지만 관광하느라 점심도 거른지라 정말 맛있게 먹었다. 식당 이름이 일본식이었지만 주인장은 한국인이었다. 놀랍게도 그 옆 태국 음식점도 그 옆 바비큐 가게도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것으로 보였다. 사막 한가운데 이 작은 도시에서 맛집을 열 용기를 낸 한국인들이 존경스러웠다. 


다음날 브라이스Bryce 캐년으로 가는 길에 호스슈 밴드 Horseshoe Bend와 콜로라도 댐을 둘러보았다.

후버댐의 물이 말라가서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이미 여러 가지로 물 사용을 제한하는 법들을 시행하고 있지만 강에 의존하고 있는 여러 주들의 이해관계가 달라서 실제로 강물을 보존하는 효과를 크게 거두지 못하는 현실이라고 한다. 

최근에 미 연방정부가 1조 원이 넘는 재정을 투입해서 강 하류의 3개 주가 2026년까지 물 절약에 합의하게 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앞으로 3년간 서울의 20배에 달하는 면적을 30cm 높이로 채우는 양만큼의 물을 절약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대신 각 주에서 절약한 물에 비례해서 연방정부가 보상금을 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본 강의 상태는 심각했다. 거의 바닥만 겨우 덮은 댐과 호스슈 밴드의 강물을 보니 생명이 살 것 같지가 않았다.

애리조나와 네바다, 캘리포니아 주민들의 식수를 공급하고 그 지역 관개농업의 수자원인 콜로라도 강이 몇 년간의 이상 가뭄과 인간의 남용으로 말라가고 있는 심각한 상황이다. 

생명을 탄생시키고, 신비스러운 자연을 조각하기도 하며, 많은 시와 그림과 영화를 만드는데 영감을 준 물이 이제까지 묵묵히 수행해 온 역할을 더 이상 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운 생각이 든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너무나 풍부한 수자원을 가진 나라(캐나다는 강과 호수와 얼음으로 뒤덮인 나라이다)에서 살다가 수많은 사람과 농작물, 동식물들의 생명줄이 심각하게 말라가는 것을 직접 보니 더 각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안타까운 마음은 묻어두고 물이 빚은 또 하나의 경이를 보러 유타 주 브라이스 캐년으로 향했다. 

하얗고 노랗고 오렌지 색의 사막성 꽃들이 만발한 평원을 지나고 붉은 멧등 같은 암벽들이 서있는 산악지대를 지나는데 비가 뿌린다.  얼마나 반가운 비인가. 그러나 곧 비가 내리는 지역이 끝났다. 

브라이스 캐년으로 들어가는 입구, 빨간 협곡Red Canyon이 나타나고 구불거리며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신기한 붉은 절벽 사이 산길을 조금 더 간 뒤에 넓은 들판에 위치한 브라이스 캐년의 마을 센터가 나타난다. 식당과 숙박업소, 기념품 가게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이다.

호텔에 체크인만 하고 바로 국립공원 안으로 향했다.

오늘은 시간이 별로 많지 않아서 메인 주차장에서 가장 가까운 림을 걷기로 했다.

선셋Sunset 포인트에서 선라이즈Sunrise 포인트까지.

선셋 포인트에 올라 선 순간 발아래 펼쳐진 광경은 황홀하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공원 입구에서 받은 안내 자료에 있는 표현 <돌로 쓴 시Poetry in stone>가 전혀 과장이 아니다.

핑크빛 절벽이라고도 불리는 브라이스 캐년은 그랜드 캐년에서 자이온Zion 캐년으로 이어지는 미국 서부의 거대한 계단형 지형 중에서 가장 최근에 형성된 지층이다. 그랜드 캐년의 가장 윗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지층이 주로 브라이스 캐년을 형성한 지층이다. 5억 2천5백만 년 전에 형성된 이 지층은 이 지역의 날씨의 특수성 때문에 이런 조각품으로 변신하게 되었다. 밤과 낮의 일교차가 큰 고지대 날씨 때문에 밤에 얼어붙은 눈과 얼음이 낮에는 녹아 바위틈 사이로 스며들고, 밤이 되면 다시 얼어 바위의 틈새를 벌리고 갈라놓는다.

수없이 반복된 이 물의 작용으로 원주민들이 후두스Hoodoos라고 부르는 돌 조각품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림 트레일에는 서로 다른 원형극장 안에 서있는 조각상의 군집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가 여러 군데 있다.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전망대Inspiration view point>는 이름 그대로 누구나 예술가가 되게 하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하나하나를 보면 다 다르지만 함께 모아 놓으니 모두 같은 듯하기도 하고, 이 무리와 저 무리를 구별하기도 어렵지만 그렇다고 같다고 할 수도 없는, 하나하나의 독특한 개성이 아름답지만 함께 모여있음으로 해서 또 다른 아름다움을 찬탄하게 하는 자연의 조각들. 

우리네 사람들도 다른 피부, 다른 얼굴 모양, 다른 종교, 다른 성적 취향, 다른 취미를 갖고 있지만, 누가 더 잘 났고, 누가 더 예쁘고, 누가 더 똑똑하다고 다투며 배척하지 않을 때, 모여서 함께 평화롭게 공존하며 서로를 빛내줄 때  다르지만 본질에서는 같은 이 원형극장의 조각들처럼 더 아름다운 <인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물과 시간은 하루도 빠짐없이 이들을 다시 다듬고 부수고 새로운 작품을 빚어내고 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수없이 많은 후두들을 보고 감탄하면서 자신 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본 후두, 자신 보다 나중에 올 사람들이 볼 후두와 같은 후두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각자 다른 브라이스 캐년을 보고 간다. 브라이스 캐년은 사실 매일 조금씩 그 모습을 바꾸고 있다. 캐년의 변화를 우리의 무딘 감각으로는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시간이 흘러 어느 날 다시 찾아와 보면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저 아름다운 바위가 부서지고 풍화되어 그 자리가 붉은 흙이 덮인 민둥산이 되어있는 것을 발견하겠지. 마치 그저 항상 똑같은 사람으로 그 자리에 있는 줄 알았다가 어느 날 그 자리가 비어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그러나 그 발견이 갑작스러운 것은, 사실은 내가 일상의 감각에 무디고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지 못하고 한 자리에 멈춰서 있었기 때문에, 시간과 함께 작용한 눈과 물과 얼음과 햇볕이 나와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언젠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조각상들이 사라지고 그 대신 새로운 조각들이 아름답게 그 자리를 채울 것을 상상하며 사람의 삶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함께 모여 평화롭게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만으로도 짧은 사람의 한 생애를 왜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배척하는데 소비해야 할까? 내가 혹은 다른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라진 그 자리에 또 다른 사람들이 서있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갈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마음이 평화와 안식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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