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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세상 Jun 03. 2023

그랜드 캐년을 바라보며

                           우주의 일부가 되다

물의 힘은 진정 위대했다.

이 거대한 협곡이 저 작은 콜로라도 강에 의해 깎이고 파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협곡의 위에서 내려다보니 천길 낭떠러지 밑으로 구불거리며 흐르는 탁한 푸른색의 콜로라도 강은 거의 멈춰 서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규모의 협곡이 저 보잘것없어 보이는 강물에 의해 만들어졌다니...

18억 년의 시간과 끊임없는 흐름에 비밀의 열쇠가 있다.

                                                                            이런 평원의 끝이 천길 낭떠러지가 시작되는 림이다                                                                      

그랜드 캐년 안을 흐르는 콜로라도 강의 너비는 약 91m 정도라고 한다. 

캐년 자체의 깊이는 1.6km,  협곡의 너비는 평균 16km 정도이다. 협곡의 북쪽 평원에서 강바닥까지의 깊이는 2.4km이다.

비와 눈 녹은 물이 계곡의 옆구리를 깎아내리며 콜로라도 강으로 떨어지고 더 많은 물이 합쳐져서 힘을 얻은 강은 계곡의 바닥을 파고들어 깊이를 더한다. 콜로라도 강은 옆으로 계곡을 넓히지 않고 밑으로 깎아 들어간다고 한다.

이리해서 마치 층층이 쌓아 올린 케이크를 칼로 자른 듯 형형색색의 단층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랜드 캐년의 가장 밑바닥은 18억 4천만 년 전에 생성되었고 가장 윗부분은 2억 7천만 년 전에 생성된 땅이라고 한다. 9개 정도의 지층이 있는데 각각의 층이 생성되는데 수천 년에서 수억 년이 걸렸다는 기록이다.

계곡이라면 당연히 높은 곳에 올라야 내려다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나는 그랜드 캐년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아무것도 안 보이는 평평한 땅에 소나무 종류의 작은 나무들이 여기저기 군집을 이루고 사막의 메마른 덤불 등이 뒤덮고 있어서 좀 놀랐다. 웅장한 캐년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주차장에서 림 트레일이라고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라 걷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전망대 같은 곳에 도착했는데 비로소 사진에서만 보아 온 거대한 협곡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평원에서 갑자기 수천 길 땅 아래로  떨어져 펼쳐지는 풍경을 미처 예상하지 못해 더 놀랐던 것 같다.

평균 나이 65세인 동생과 나는 림에서 협곡의 밑으로 내려가는 하이킹 코스는 포기하기로 했다. 경사가 너무 심해서 심장 기능이 원활하지 않은 우리에게는 무리다 싶었다. 대신 이틀에 걸쳐 캐년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르는 남쪽 림코스를 즐겁게 걸었다. 오전에는 선선하고 맑은 대신 오후가 되면 구름이 많이 생기고 간혹 빗방울도 뿌리는 이 동네 날씨의 특징을 첫날 깨닫고 아침 일찍 두어 군데 림을 돌고 햇볕이 너무 뜨겁거나 비가 내리는 동안은 차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날이 개고 선선해지면 다시 림을 걸었다. 림의 중요 전망대끼리 무료 셔틀이 운행되어 일정을 쉽게 조정할 수 있다.


베르캄프Verkamp포인트에서 서쪽 평원 너머로 해가 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바다로 지는 해만큼이나 드넓은 대지 뒤로 넘어가는 해도 인상적이고 아름다웠다. 내 가슴속의 상실감과 슬픔과 그리움도 지는 해의 아름다움 속에 함께 타다 지기를 기원했다. 


계곡의 가장자리를 따라 걷는 림 트레일 코스는 그랜드 캐년에 높이 솟아있는, 아니 사실은 아직 깎이지 않고 남아있는 땅덩어리들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다시 감상하게 하기도 하고 멀리 보이던 절벽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하기도 하고 가끔씩 협곡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콜로라도 강도 멀고 가깝게, 또 다른 구비에서 만나게 해 준다. 하이킹 도중에 사슴과 도롱뇽도 만나고 메마른 돌밭에서 피워 낸 예쁜 꽃들도 만났다.


 제일 흔한 도롱뇽                 마시멜로 풀: 하얀 열매 때문에 붙여진 이름. 사실은 소금 성분이라고.


깎아지른 절벽들 사이로 구불구불 콜로라도 강을 향해 내려가는 트레일을 보면서 저 트레일을 다니던 사람들은 이 협곡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생각했다. 18억 년의 세월이 빚어낸 풍경 앞에서 짧은 인생의 덧없음을 생각했을까, 거대한 자연의 창조물 앞에서 창조주의 위대함을 떠 올렸을까, 혹은 알지 못했던 땅, 디뎌 보지 못한 땅을 밟아 보고 싶은 충동과 모험심으로 불타 올랐을까. 


사람의 삶의 한 주기에 비해 보면 영겁이라 할 만한 시간 동안 물에 깎이고 바람의 노래를 들으며 제 몸이 돌멩이가 되고 가루가 되어 새로운 생명을 틔우고 살리는 일을 수백, 수천 번 거듭했을 캐년의 지난 세월이 우주 생명의 윤회를 보는 것 같았다. 암석행성인 지구에 어느 날 얼음을 잔뜩 가진 소행성대의 혜성이 부딪혀, 죽은 암석의 별을 생명이 살 수 있는 물을 가진 별로 바꾸어 놓았다. 물은 거대한 평원에 틈을 만들고 부서진 큰 바위들은 작은 돌멩이로 쪼개지고 강물에 휩쓸려 바다로 향한다. 가루가 된 미네랄들은 물에 녹아 유기체들의 몸을 만들고 남은 광석과 흙은 쌓이고 쌓여 또 다른 지층을 만들고... 그 지층엔 또 그때 살았던 생물들의 몸이 묻히고 섞이며 새로운 생명들을 탄생시키는 밭이 된다. 지금 내가 딛고 서 있는 이 땅도 언젠가 인간이 생산한 온갖 부산물과 생명과 죽음이 녹아든 또 하나의 지층으로 남겨지겠지. 


사라지는 것은 없다. 물도 돌도 나무도 새도 사람도... 모든 것이 죽어 사라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딘가에서 우주의 일부로 계속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했던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난 뒤 비로소 실감하게 된 삶의 허망함. 그러나 생명은 그저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이 움트는 터전으로 변하고 거대한 대지와 대양의 일부가 되어 내게 바람소리와 물소리와 새의 지저귐, 황홀한 색과 향기를 지닌 꽃으로 다시 찾아온다는, 어쩌면 평범한 진리를 협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내 휑한 마음을 달래듯 어루만지며 새삼 깨닫게 한다.


캐년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선 림코스 어디를 걸어도 좋지만 캐년을 형성하고 있는 지층들을 더 잘 이해하고 싶다면 베르캄프Verkamp 포인트에서 야바파이Yavapai 포인트의 지질박물관까지 시간 여행 코스를 걷는 것을 권한다. 이 길에는 18억 년 전의 암석부터 2억 7천만 년 전의 암석을 시간대 별로 전시해 놓고 만져보라고 초대한다. 

                    

그랜드 캐년의 가장 윗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지층

각기 다른 색과 무늬와 결을 가진 수억 년 된 돌들을 쓰다듬으며 걸은 먼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시간 여행은 상실감으로 과거에 멈춰져 있던 나의 마음을 다시 자연스럽게 시간을 따라 오늘로 걷게 하였다. 


혼자였다면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엄두도 못 냈을 여행을 하고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게 된 것은 순전히 동생 덕분이다. 동생은 아직 일을 하고 있어서 8박 9일의 미 서부 여행을 위한 휴가를 마냥 쉽게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더 나이들면 여행도 마음대로 못하게 될 거라는 피할 수 없는 진실 앞에서 두 노년의 여인네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적극 누리기로 했다.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앤틸롭Antlelope 캐년을 거쳐 브라이스Bryce 캐년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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