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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세상 Jul 15. 2023

집단착각,

그리고 한강의 <소년이 온다>

요즘 생각해 보면 나는 꽤 오랫동안 인간에 대한 깊은 생각 없이 살아왔던 것 같다.

그저 "존재가 사고를 규정한다"는 유물론적 논리를 지나치게 단순하고 일차원적으로 받아들이며 살았다.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많은 문제가 '올바른 사회제도'가 정립되면, '정의와 평등'이 실현되면 해소될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 언제부터인지 픽션이 아닌 책으로는 역사나 경제, 사회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책들만 주로 읽었다.

그런데 나이 예순이 훨씬 넘은 지금, 인간과 세상에 대한 나의 이해는 점점 더 삐걱거리며 아귀가 안 맞고 애매해지는 것 같다.

'정의와 공정'을 외치며 전 법무부장관의 가족을 도륙하다시피 한 대학생 집단이,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이나 노동자 집단에 대해 휘두르는 노골적이고 편향적인 권력기관의 행태에 대해서는 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일까.

대학생은 그 시대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며 가장 순수하기 때문에 자기 개인의 이해관계를 떠나 진실을 대변한다고 믿었던 나의 평생의 믿음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교수들, 또 각종 사회단체들이 일제 강제동원 배상문제나 핵오염수 방류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비판하는 성명을 연달아 내고 있는데도 각 대학의 학생회는 조용하다. 이 낯선 풍경 앞에서 나는 그동안 나를 지탱해 온 믿음과 기반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공자가 '이순지년'이라고 말한 60세는 천지만물의 이치를 통달하고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나이인데, 나의 이순지년은 아직 도달하려면 한참 멀은 것 같다.


그래서 부득이 다시 공부를 한다. 

오래전에 밀쳐두고 관심도 주지 않았던 사회심리학이나 철학, 생물학, 심지어 뇌과학과 물리학 책이나 강의도 조금씩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다. 그러는 동안 내가 알게 된 것은 뜻밖에 나와 같은 필요를 느끼고 같은 공부를 시작한 나와 같은 보통사람들이 제법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요구에 부응해 쉽게 쓰인 과학 책이나 명강의들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 내게 다시 희망을 준다.

변화는 보다 개인적이고 낮은 차원에서 더 깊이 있게 진행되고 있다는 믿음을 가져도 될 것 같아서. 


토드 로즈Todd Rose가 쓴 <집단착각Collective Illusions>이라는 책에 의하면 우리가 사회적 통념/규범social norm에 순응conform하거나 공모complicit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가치/규범에 일치하는 행동을 선택할 때 사회 구성원 모두가 집단착각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첫발을 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명한 '벌거벗은 임금님'의 일화에서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자신의 생각을 처음 소리 내어 말한 소년의 행동이 모두를 집단착각의 거짓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첫걸음인 셈이다.

 

   사무직 여성은 직장에 출근할 때 반드시 화장을 하고 스커트와 하이힐을 착용해야 한다.

   사무직 남성은 넥타이를 매고 와이셔츠를 입고 정장을 해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 규범을 모두 그냥 순응하면 결국 그 규범을 지속시키고 강화하는 공범이 된다.

다시 말해 일의 효율성을 높이는데 이런 규범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거나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그 규범을 따르면 결국 회사원 모두가 서로 다른 동료들이 그 규범이 옳다고 여기는 줄 착각하게 만든다. 그것이 집단착각이다. 그리고 그 규범은 계속 우리를 옥죄고 자신의 가치와 집단의 규범 사이에서 갈등과 긴장이 계속 높아질 것이다. 


인간에게는 사회적 규범에 순응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집단착각에 빠지기 쉽다. 인간은 가족이나 이웃, 친구, 직장 등 집단에 소속되고 싶은 욕구가 있으며,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 추방당할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가치와 달라도 조용히 집단의 규범에 순응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인간은 생리학적으로 특히 두뇌의 활동이 에너지 절약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두뇌는 들어온 정보를 취사선택해서 저장장치에 깊이 묻어두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갈등을 일으키는 정보, 사고를 많이 필요로 하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버리려는 경향을 갖고 있고, 사회적 규범에 순응하는 것은 선택을 위해 고민할 필요가 없으므로 가장 에너지 절약형 방식이다. 

또 사회적 규범은 꼭 억압적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공의 선을 위해 큰 역할을 한다. 

교통법규를 지키는 것, 가게에서 또 정류장에서 줄 서는 것은 대표적으로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사회적 규범이며 구성원 모두에게 불필요한 에너지 소비를 방지하는 사회적 효과를 가진다.


그런데 사회의 통념이나 가치는 때가 지나 유효성이 사라진 것도 있고 특정한 목적을 위해 타락한 것도 있다. 이런 잘못된 사회적 가치와 자신의 가치가 충돌할 때, 자신의 가치를 선택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사회의 가치나 규범도 바뀔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나 이 선택은 소소한 일상의 영역에서 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이 규범이 권력자들에 의해 강요된 것일 때 그것과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은 강한 용기와 신념을 필요로 한다.

그 불일치를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들, 자신의 가치에 대한 신념이 강한 사람들이 사회의 진보를 이끌어 나간다고 한다.

토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 혁명Velvet Revolution'을 촉발시킨 바츨라프 하벨의 연극을 통해 이 과정을 설명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 먼 나라 얘기가 필요 없다. 

바로 가까이에 촛불혁명이 있고, 조금 더 돌아가면 1980년 광주가 있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는 그 해 광주에서 도청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다가 죽거나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해 쓴 작품이다.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실제 인물들의 얘기를 자료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되살려냈다. 

여러 사람이 각자 자기 얘기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이들은 특정 시점, 특정 장소에서 서로 만나고 연결되어 있다.

그중에 살아남아서 나중에 서울의 한 작은 출판사에서 근무하는 젊은 여성의 이야기가 있다.


그녀는 수배 중이던 사람이 번역한 책을 편집하게 되고 그 번역가를 만나 번역료를 전달한 죄로 치안부에 끌려가 수배자의 연락처를 대라고 문초를 당하고 폭행도 당한다. 그녀는 출판사에서 출판할 책의 초판본을 계엄사의 검열관에게 가지고 가 검열을 받는 일을 한다. 그녀가 가지고 간 희곡은 검은 숯덩이가 되어 돌아온다.

책의 의미 있는 거의 모든 문장에 검은 매직펜이 그어지다 못해 뒷 쪽은 아예 페이지 전체가 까맣게 되어 있다.

출판사는 희곡의 출판을 접었지만 작가와 연출가는 희곡을 무대에 올리기로 한다. 객석 여기저기에 앉아있는 형사들을 보며 그녀는 걱정한다. 무사할 수 있을까?   

      

      검열과에서 삭제한 대사들이 배우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면 저 사내들은 일어설까. 날렵하게 무대로 

      올라가 배우들을 덮칠까.... <중략>... 서 선생은 체포되거나 수배되어 다시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 될까.

      무대에서는 꿈속처럼 느린 걸음으로 남자들의 모습이 사라졌을 때 여자가 말하기 시작한다. 

      아니, 말하기 시작한 것 같다. 아니, 여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소리 없이 입술을 달짝이고 있을 뿐        이다. 

      그 입술의 모양을 그녀는 또렷하게 읽을 수 있다. 서 선생이 원고지에 펜으로 쓴 희곡을 그녀가 직접 

      입력해 삼교까지 봤기 때문이다.

                                .... <중략>....

                        "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당신을 보았던 내 눈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내 귀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마치 눈을 뜬 채 꿈을 꾸는 듯 허공을 향해 끼익 끽 소리를 내며 여자가 입술을 움직이는 사이, 

     삼베옷의 남자가 무대 위에 올라선다. 두 팔을 허공에 휘저으며 여자의 어깨를 스쳐 지나간다.

                                      .... <생략>....


그들은 소리 없는 대사로 연극을 공연했다. 

객석에 앉은 사람들은 배우들의 입모양을 읽기 위해 두 손을 꼭 쥐고 두 눈을 부릅뜨고 배우들에게 집중했다.

나는 이 장면을 읽으며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에서 해야 될 말을 하기 위해서 비명 같은 소리와 몸짓으로 자기를 표현했던 사람들. 그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과 몸짓을 보는 객석의 관객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나 보다 훨씬 더 전율하고 또 전율했을 것이다.

그런 비명 같은 아우성들이 우리를 광주에 대한 집단착각을 깨고 진실을 알게 되는 역사로 나아가게 한 것이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힘은 무엇일까?

토드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일체성self congruence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 일체성을 가지는 것은 인간이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가를 규정하는 가장 내밀한 경험' 이며, 자기 존재의 핵심에 자리 잡는 것이다. 자기 일체성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고 느끼며 더 조화롭고 개방적이고 타인을 진정성 있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또 토드는 인간의 두뇌는 자기 집단에 받아들여지고 인정받았을 때나 마찬가지로 그 집단의 규범이나 가치를 부인하고 자신의 진실한 가치를 찾는 결단을 했을 때도 똑같이 옥시토신과 도파민을 분비한다고 한다. 행복은 두가지 길에서 추구할 수 있으며 어느 것이 보다 지속적이고 근본적인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각자의 진실한 자기성찰에 달려있다. 

일체성을 회복하는 것은 '자기 존중Self-worth'과 같은 말이며 심리학적 발달에서 최고의 단계인 자기실현self-actualization' 의 욕구(애이브러햄 매슬로) 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 경험을 한강은 소설 속 한 청년의 입을 빌어 날카롭게, 빛나게 표현한다.

스물세 살의 교대 복학생이었던 남자의 얘기이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게 인생의 목표였던 내가 소회의실의 조원들을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다는 것은,

     그 밤 도청에 남은 사람들이 그만큼 오합지졸이었다는 걸 뜻합니다.

     우리 조의 절반 이상이 미성년자였습니다.

                            .... <중략>....

     스무 살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집으로 보낸다는 지도부의 지침을 거부한 건 바로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그들의 의지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만 17세까지만이라도 억지로 돌려보내는 일에 긴 언쟁과 

     설득이 필요했습니다.

                             .... <중략>....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 <중략>....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 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게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그날 도청에 남은 어린 친구들도 아마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겁니다. 그 양심의 보석을 죽음과 맞바꿔도 

      좋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 <중략>....

      아니요, 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이 소설은 너무 극단적인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소설 속의 얘기들은 한강 작가의 상상 속에서 빚어진 가상이 아니고 실제로 그들이 그리고 우리가 겪었던 현실이다. 용기 있는 사람들의 자기 일체화가 왜, 어떻게 일어나며 그것이 어떻게 강력한 집단착각을 부수고 새로운 공동체의 규범과 인식으로 나아가는지 토드의 이론에 부연설명이 필요 없이 선명하게 보여준다.

 

소위 명문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혹은 의사나 변호사나 검사가 되기 위해,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죽어라고 청춘을 바쳐 공부하는 것이 내 가치에 일치하는 것인가 혹은 내 부모의 가치에 순응하는 것인가?

더 넓은 평수의 아파트로 옮기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는 것과 좁은 아파트에서 살지만 그 시간을 가족과 더 깊은 대화와 관계를 맺는 데 사용하는 것- 어느 것이 진정 가족이 원하는 것이고 당신이 원하는 것인지 진지하게 얘기를 나눠본 적 있는가?

다른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것, 그것을 먼저 차지해야만 나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 그런 성취는 타인을 희생시키고 얻는 짧은 순간의 만족이다. 사회 전체가 그런 욕망으로 들끓을 때 아무도 진실한 만족과 기쁨을 이룰 수 없다. 곧 새로운 상품, 더 많은 연봉, 더 넓은 아파트를 욕망하게 될 뿐이다. 입으로 평등한 교육, 공교육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그럴만한 능력이 생기자 자신의 자녀들을 사립학교에 진학시키고, 좋은 대학에 보내자고 '다른 사람들이 다 하는 짓을 했을 뿐인' 소위 진보인사라는 사람들 역시 자기 일체성을 포기한 사람들이다. 

더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사회가 만들어 놓은 규칙 안에서 '공정'을 외치는 것은 그 규칙에 순응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그 규칙 안으로 몰아넣는 행위이다. 그 규칙이 자기 일체성을 죽이는 것인지 자신의 정체성-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살리는 것인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사회적 가치/규범을 부정하는 일은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아니다. 가족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직장 내에서 비난과 질시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때로는 개인적으로 큰 희생을 치러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나를 긍정하고 신뢰하고 가장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위해 한 발자국을 내딛지 않으면 기존의 사회적 규범이나 가치는 스스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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