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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세상 Apr 29. 2023

삶이 나를 가두고 있다고 느낄 때

모스크바의 신사---갇히지 않는 영혼  /  따뜻한 마음

   작년에 밴쿠버 도서관에서 전자책으로 빌려 읽기 시작했는데 당시 나는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아래 고통받고 있었다. 상황 자체를 바꿀 수 없다면 내가 바뀌어야만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력감과 절망감으로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에 침대 속에서 아픈 현실을 잠시라도 잊게 해 줄 만한 책을 찾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잠시나마  마음에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이 책의 저자는 에이모 토올스(Amor Towles)라는 미국 작가인데  증권가에서 일하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 첫 소설 ‘우아한 연인들(Rules of Civility)’ 을 발표했다. 두 번째 책인 <모스크바의 신사>는 대단한 호평을 받았고 찾아보니 한국에서도 번역이 되어 있어 반가운 마음으로 책을 소개하게 되었다.


   삶이 삭막하고 사막처럼 건조하다고 느껴질 때, 자신의 일상이 쳇바퀴 속 다람쥐처럼 변화가 없고 자유를 잃었다고 느껴질 때 읽어볼 만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저자는 호텔에 평생 갇혀 살아야 하는 한 남자를 통해 가장 각박한 상황에서 조차 인간의 영혼은 품위와 자유로움을 유지하고 창조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마치 가벼운 버전의 톨스토이나 체홉을 읽는 듯했고, 러시아의 문학과 음악에 대한 담화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으며, 폭압적인 시대를 살아가지만 일상 속에서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자신들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전통과 요리와 예의범절들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호텔 주변의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위트 넘치는 묘사들이 책을 읽는 내내 따뜻하고 흐뭇한 미소를 떠올리게 한다.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주의 체제가 뿌리내려가는 과정에서 엄혹한 시대를 살아낸 각기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겪는 각각 다른 상처와 영광이 이 책에서는 잠깐씩 스쳐 지나듯 언급될 뿐 그다지 깊게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리얼리즘에 기반한 픽션이기는 하지만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인물들은 대단히 독창적이고 약간은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그 점이 픽션이 갖는 힘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저자가 창조한 인물들은 충분히 사랑스럽다. 그들에게는 나름의 고수해야 하는 원칙이 있었고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자신만의 가치와 자부심이 있었다. 현실의 제약에 굴복하지 않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협력하는 인물들,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며 서로에게 헌신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담하지만 위트 넘치게 그려진다.


   볼셰비키 혁명 후 파리에 거주하던 주인공[로스토프 백작]은 그대로 망명해서 편안한 일생을 살 수 있었음에도 고국에 남아있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위해 혼란스러운 러시아로 돌아간다. 자진 귀국한 점과 그가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반짜르 혁명 시 -사실은 그의 친구 미시카가 쓴 시이지만 짜르 통치하에서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 막강한 귀족 집안의 일원인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함- 덕분에 사형을 면하고 평생 모스크바의 유명한 메트로폴 호텔에 거주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시베리아가 아닌 특급호텔이 유배지로 결정된 것에 대해 소설가의 픽션의 자유를 인정하자. 이 소설에서 그리는 소소한 일상의 에피소드와 러시아의 문학과 음악, 귀족 계급의 요리문화 등은 호텔을 배경으로 했기에 쉽게 가능했을 것이다.


    로스토프 백작의 생활에 깊숙이 들어온 몇 사람이 있다. 

    그가 30대 초반 젊은 나이에 호텔에 유배당해 무료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을 때 우연히 만난 소녀 니나가 있다. 니나는 왕성한 호기심을 지닌 소녀로 로스토프 백작의 귀족시절의 생활과 문화들에 대해 소녀다운 질문들을 던진다. 또 어디선가 얻은 호텔의 마스터 키로 호텔 곳곳의 비밀스러운 장소들로 백작을 이끈다. 사실 누구 보다 호텔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백작은 니나와의 만남에 의해 인간의 사고가 얼마나 익숙함에 갇혀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니나는 유배 중인 백작이 접할 수 있는 외부 세계의 전령 특히 혁명기 새로운 세대의 전령과 같은 존재로 로스토프 백작의 삶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녀가 떠날 때 호텔의  마스터 키를 백작에게 선물로 주는데 이 열쇠는 그 이후 로스토프 백작의 삶에 여러 가지 도움을 주게 된다. 

   니나는 그 후 간간이 등장한다. 넘치는 호기심과 원칙주의자의 면모를 가진 청년 당원으로 잠깐 나타나고 세월이 흘러 어느 날 자신의 딸이라며 어린 소녀-소피아-를 데리고 나타나 백작에게 잠시 돌봐달라는 부탁을 하고 떠난다. 사실은 돌아올 기약이 없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다. 

  

   어쩌면 원칙주의자였던 니나가 딸의 운명이 주어진 환경이 아닌 새로운 곳에서 시작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는 이 짧은 장면이 스탈린과 흐루시초프에 이르는 시기 러시아의 혼탁한 정치적 환경, 혁명적 이상주의자들의 좌절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열성적이고 원칙적인 청년 공산당원이었던 니나와 그의 연인이 어떻게 해서 시베리아의 유배지로 떠나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그 절박했을 상황에 딸을 맡길 수 있는 믿을 만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에, 또 자신의 안위에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어린아이를 담담히 받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이 소설의 초점이 있다. 로스토프 백작은 소피아를 자신의 딸처럼 돌보고 소피아는 로스토프 백작과 호텔에서 일하는 그의 친구들의 보호를 받으며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로 자란다.

소피아는 백작의 삶의 목적이 되고 결국 백작이 유배지에서 탈출을 결심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호텔에 평생 유배당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비관하지 않고 담담히 그 안에서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들을 찾고 지키며 한 번도 탈출을 꿈꾼 적이 없는 백작이 소피아의 미래가 위험에 처하자 새로운 세대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필요하다며 탈출을 계획한다.


    또 한 사람 - 백작의 오랜 친구 미시카가 있다. 미시카는 열렬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지지자이고 러시아 문학에 깊은 애정과 자부심을 가진 애국자이다. 혁명 이후 그는 정부에서 일을 했지만 체홉의 전집을 발간한 일 때문에 숙청을 당하게 된다. 그의 얘기도 역시 짧고 담담하게 지나가듯 소개된다. 다만 미시카가 백작에게 보낸 체홉의 전집은 소중하게 보관되고 세상에 남게 된다. 


    그리고 백작이 머물던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호텔 꼭대기 좁은 다락방으로 쫓겨난 뒤 그 스위트룸을 차지한 잘 나가던 영화배우 안나도 있다. 그녀 역시 시간이 흐르며 프리마돈나의 위치에서 차츰 내리막 길을 걷지만 백작과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안나는 미모의 유명배우라는 자신의 이미지에 흔들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정직하게 봐준 백작의 도움으로 인생의 위기를 넘길 수 있는 자기 확신과 자부심을 얻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책의 결말 부분에서 안나와 소피아로 대표되는 서로 다른 두 가치가 어떻게 백작의 여생에서 갈려지고 선택되는 지를 보면서 특히 감동을 받았다. 시간이 흐르고 상황도 달라지고 때로는 생명이 위협받기도 하지만 백작은 항상 변함없이 자신의 중심을 지키며 자신의 가치에 충실한 선택을 했다. 


    백작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각기 지향하는 이념도 다르고 계급이나 직업도 다르다. 그들에게 공통된 점이 있다면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고 환경을 지배하려고 노력하는' 점이다.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체홉의 작품들을 지키기 위해 상부의 눈을 피해 책을 만드는 미시카나 프롤레타리아 이념에 충실한 새 지배인의 무지와 파괴적(?) 레스토랑 운영 지침으로부터 전통의 메뉴와 예절을 지키려고 백작과 협작 하는 종업원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심지어 요리와 와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혹은 귀족계급의 문화를 지워버리려 의도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출신 새 웨이터가 저지르는 식탁의 '참화'를 피하기 위해 로스토프 자신이 웨이터로 일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각자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협력하는 원동력은 그들 사이의 신뢰와 애정이다.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하게 하는 가치를 무엇에 두고 있는가? 그 가치가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옮겨 다닌다면 나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또한 가치들이 서로 충돌하는 사회에서 나의 가치는 나의 힘으로만 지킬 수는 없다. 나의 가치는 나의 존재를 의미 있게 받아들이는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에 의해 지켜지고 성장한다. 나의 존재의 중심인 가치와 그것을 지켜주는 관계에 대한 충성심 혹은 헌신과 희생이 전제될 때 우리는 비로소 로스토프 백작처럼 자유로운 영혼, 따뜻한 마음을 얻을 자격을 가질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그것이 직장이든, 가정이든, 학교든 어쩌면 우리 모두가 평생 씨름하며 살아가야 할 각자의 유배지일지도 모른다. 그 유배지의 환경이나 조건에 매몰되면 우리의 사고는 편협해지고 감정은 균형을 잃고 생활 자체가 고통이 될 수 있다. 또 너무나 쉽게 자신의 가치를 버리고 이리저리 옮겨가는 요즘의 세태는 '관계'의 상실시대를 보여주는 것도 같다. 그러나 그 환경에서도 지키고 싶은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고 그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믿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를 찾는다면 로스토프 백작처럼 자신의  좁은 호텔 다락방에 갇히지 않고 호텔 전체를 무대로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만들어나갈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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