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봄 빛
옐로스톤을 북쪽으로 관통해 북쪽 출입구를 나서면 바로 만나는 작은 마을이 하나 있다. 주로 관광객들을 위한 숙박시설과 편의시설들이 모여있는 마을인데 혹시 일정이 마땅하면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동생은 예전에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자고 일어난 다음날 아침 눈앞에 펼쳐진 부드러운 등성이의 초원과 싱그러운 계곡에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 마을 옆을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한동안 구불구불 꿈같은 길을 달려 계속 북쪽으로 간다. 시냇물 주변으로는 작은 마을들을 만날 수 있는데 주로 낚시꾼들을 상대하거나 작은 농장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같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에서 살면 마음에 평화와 행복만 있을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간의 뇌는 그런 시. 공간을 뛰어넘어 우주 삼라만상의 고뇌와 욕망을 품고 있으니 이 사람들의 인생이 그 평화로움과 반짝이는 빛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내 마음 또한 부질없는 기대이리라.
지난밤 그가 오랜만에 내 꿈속에 찾아왔다. 어제 나는 옐로스톤의 높고 낮은 산길을 이리저리 돌며, 그 길이 수많은 질곡의 역사를 지나왔지만 아직도 모순이 계속되고 있는 내 조국의 근. 현대사를, 그와 나의 인생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적이 부르는 <걱정 말아요 그대>를 듣다가 눈물이 솟구쳤다. 캐나다 생활 20년 동안 일이 끝나고 늦은 시간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는 전인권이 부르는 이 노래를 틀어놓고 목청껏 함께 부르곤 했었다. 조국에서 들려오는 소식 하나하나에 아파하고 분노하고 기뻐하던 그는 몸은 떠나왔지만 마음은 떠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가슴에 불을 품고 살다가 온몸을 다 태우고 가볍디 가벼운 재가 되어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런 그의 삶이 여전히 안쓰럽고 아파서 눈물이 났다. 그 때문일까, 어젯밤 꿈속에 그가 찾아와 내 곁에 머물다 갔다. 새처럼 가벼운 몸으로 떠난 그는 꿈길에 나를 찾아오면 아무 말 없이 그냥 내 곁에 서있다 간다. 내가 어느 골목길에서 길을 잃고 황망한 마음으로 서 있으면 그가 나타나 가만히 내 옆에 서있다. 그러면 나는 불안이 사라지고 편안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생전의 그는 항상 나를 자극하고 지적하고 편안함에 안주하지 못하게 하는 날카로운 비판자였는데 꿈속의 그는 나의 위로가 되어주고 내가 길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준다. 살아있는 동안 나를 너무 힘들게 해서 미안했던 것일까. 나의 바람이 꿈속의 그에게 덧씌워진 것일까.
우리의 인생을 닮은, 내 어머니와 내 동생의 인생을 닮은, 내리막 길과 오르막 길이 이리 휘고 저리 휘며 황홀한 암벽과 아찔한 낭떠러지, 날카롭게 깊은 계곡과 완만한 곡선의 초원이 펼쳐 보이는 길 위에서, 시처럼 아름다운 시인과 촌장의 <새날>이라는 노래가 나의 눈물 어린 마음을 감싸며 스며들었다.
새날이 올 거야
나의 영혼이
저 싱그러운 들판을 사슴처럼 뛰놀
티 없는 내 마음 저 푸르른 강을 건너
영원한 평화로움에 잠길
새날이 올 거야
나의 눈물이 그치고
슬픈 우리 별에도 종소리 들려
어렵던 지난날
눈물로 뿌리던 그 아름다운 열매들이 그대 뜰에 익을 때
새날
새날이 올 거야
떠나간 사람 저 햇살 넘치는 언덕으로 돌아올
어여쁜 날갯짓 그 푸른 잎사귀를 물고
나의 가난한 마음에 날아와 안길
새날
옐로스톤에서 글래셔 국립공원에 이르는 길은 특별히 아름답다. 우리는 하이웨이 90을 이용해 머쥴러Missoula라는 작은 도시를 통과하고 멀리 로키 산맥의 눈 쌓인 봉우리들을 바라보고, 플렛헤드 호수Flathead lake를 구경하며 7시간을 달려 공원 서쪽 입구 근처에 짐을 풀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국립공원 입구를 향해 신나게 출발했다. 마을을 벗어나 30분쯤 달렸을까, 드디어 본격적인 산악지대가 시작된다. 그런데 또... 동생이 "아... 기름..." 신음처럼 말한다. 구글을 검색해 보니 다음 주유소까지 갈 만큼 충분한 기름이 남아있다. 하지만 지난번 기름 때문에 극심한 마음고생을 한 동생은 만전을 기하고자 했다. 그 주유소가 산속 한가운데 있는데 혹시 문을 닫았으면 어쩌냐는 것이다. 산속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시간을 좀 손해 보더라도 마음의 평화를 택하였다. 우리는 차를 돌려 마을 근처 주유소로 돌아가 가스통을 채우고 다시 출발했다. 오늘의 해프닝은 이것으로 끝나길 기원하며.
이 지역은 우림지대라 옐로스톤의 건조하고 유황냄새나는 공기와는 완전히 다르게 축축하고 푸른 숲의 향을 가지고 있다.
글래셔 국립공원은 특별히 바위와 계곡이 아름답다. 각양각색의 돌덩이들이 박혀있는 암반들이 차곡차곡 쌓여있고 계곡에는 붉고 노랗고 하얗고 검은 돌들이 마치 보석처럼 깔려있다.
유명한 <going- to- the Sun> 루트는 아직 눈이 다 녹지 않아 서쪽Apgar visitor center과 동쪽St.Mary visitor center에서 일부 허용된 곳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먼저 서쪽 길로 들어가 맥도널드 호수 주변 트레일을 걸었다. 맥도널드호수 주변의 트레일은 우리에게도 아주 걷기 쉬운 코스로 여러 가지 야생화들이 한창이었다. 꽃길 사이를 걸으며 절벽 아래 호수와 길옆 켜켜이 쌓인 서로 다른 색깔의 바위 판들을 감상할 수 있다. 다시 반대쪽 썬 루트를 향해 남쪽을 돌아가다 들린 두 메디슨Two Madison 호수 앞에서 호수와 거대한 산들을 바라보며 점심을 먹었다. 이 호수는 그 자체로도 장관이지만 호수에 이르는 샛길을 드라이브하는 것이 특히 좋았다. 봄기운 완연한 자작나무들이 길 양쪽에 무성하게 늘어서 평화롭고 따뜻한 기운을 흠뻑 느낄 수 있다. 동쪽 입구 세인트 메리 호수에 도착해서 주변을 걸었다. 호수와 계곡을 감싸고 있는 높은 바위산들의 위용이 이곳이 록키산맥의 일부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이 호수에서 인도차를 따라 트레일 코스까지 조금 더 들어갈 수 있었다. 각종 삼나무들과 자작나무가 어우러진 숲길 위로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작은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내려다본 물은 너무 맑아 바닥에 깔린 색색깔의 자갈들이 보석처럼 선명하게 비친다.
이 국립공원에서 무엇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자작나무들의 색깔이다. 공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주변의 산들이 품고 있는 색깔이 나를 사로잡았다. 짙은 푸른색으로 하늘을 찌르듯 서있는 침엽수들 사이로 녹색의 활엽수들이 보이고 그 사이사이에 투명하도록 밝은 연녹색의 자작나무들이 산등성이를 수놓고 있다.
아! 봄의 자작나무가 이렇게 아름다웠구나!
처음으로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색깔이라는 생각을 했다. 수채화로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나뭇잎이 모두 떨어지고 검은 침엽수가 지배하는 겨울의 황량한 숲을 하얀 둥지로 빛내는 자작나무도 특별하지만 이 봄의 어린 자작나무 잎들이 뿜어내는 색깔은 정말 특별했다. ( 안타깝게도 사진은 그 색깔을 잡지 못했다.)
글래셔 국립공원에는 특별한 색깔이 하나 더 있다. 붉은색 바위들이 이 거대한 산악지대 많은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도로도 이 붉은 자갈을 갈아 만든 흙으로 포장되어 있다. 거기에 짙은 회색빛, 하얀색, 검은색, 노란색의 대리석을 형성하는 지층들이 곳곳에서 관찰된다. 붉은 바위와 비췻빛 호수, 연녹색 자작나무 숲과 짙은 삼나무 숲, 검은 산 봉우리의 하얀 빙설이 만들어내는 색들의 향연이 놀라운 곳이다.
이날 밤에도, 그다음 날에도 그는 꿈속으로 나를 찾아와 머물다 갔다. 그가 마치 이 여행을 함께 즐기고 있는 것 같아 내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