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하늘과 바다, 븕은 땅, 하얀 메밀꽃밭
그토록 투명한 파란색 하늘을 언제 본 적이 있었을까?
그토록 맑고 깊은 파란 바다를 본 적도 없는 것 같았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카빈디시 해안에서 본 하늘과 바다는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 순수한 파란색이 이런 것이겠구나 싶었다. 공해로 탁해진 도시의 하늘과는 완전히 다른, 그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순수하고 투명한 파란색의 하늘이 우주로 우주로 뻗어나가는 듯했다.
고운 모래사장 끝에서 완만하게 깊어지는 바다. 파란색의 다양한 변주. 무색의 투명함에서부터 점점 깊어지는 바다의 파란색도 그처럼 맑고 깊은 색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해변을 둘러싸고 서있는 해안의 붉은 절벽과 푸른 나무와 풀밭이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오염되고 지친 인간들의 마음을 감싸고 안아주는 것 같다. 이 바다와 하늘이 항상 이렇게 고요하고 순수하게 머무르진 않을 터인데 우리가 지내는 3박 4일 동안은 더없이 맑고 고요해서 그 바다와 하늘을 보며 앉아있는 순간은 시간마저 멈춘 듯했다.
카빈디시 해변의 트레일을 걷는 동안 얼굴에 부는 바람은 시원하고 등에 내려 쬐는 햇볕은 쨍하니 뜨거웠다. 붉은 모래 언덕을 하얗고 노랗고 보랏빛 야생화들이 뒤덮고 있다.
지난 8월 나와 동생은 9박 10일의 일정으로 캐나다의 동쪽 끝, 프린스 에드워드 섬과 노바스코샤로 여행을 떠났다. 7월 초 나의 심장 시술 후 회복을 돕기 위해 우리 집에 온 동생과 나는 시술 한 달 후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생각하고 캐나다의 아틀랜틱 지역을 보러 가자며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집에서 PEI까지는 자동차로 15시간 정도 걸린다. 우리는 첫날 10시간가량을 달려 프레더릭턴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PEI로 넘어가는 컨페더레이션 다리를 건넜다. 이 다리는 세계 최장의 다리라고 알려져 있으며 1997년 완공되었다. 뉴브런즈윅과 PEI섬을 잇는 이 다리 덕에 많은 관광객들이 PEI를 쉽게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캐나다로 이민 온 다음 해에 이곳으로 가족여행을 했었다. 그때는 정말 끝없이 하늘로 오르는 듯했던 다리가 이번에는 좀 빨리 끝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첫 여행 때의 강렬한 인상이 좀 무뎌진 탓인가 싶다. 마음이 무뎌진다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일어나기 마련인 긴 세월을 살아내기 위해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좀 서글픈 일인 것도 같다.
이 다리는 들어갈 때는 통행료를 받지 않는다. 다시 이 다리로 나오면 그때 40$를 내야 한다. 우리는 나올 때는 다리를 이용하지 않고 PEI의 우드랜드항에서 노바스코샤의 카리부에 도착하는 페리를 타기로 했다. 운임은 일반 승용차 1대에 40$였다. 원래는 85$에 유류비 10$ 정도를 더 받는다고 하는데 올해는 정부 정책에 의해 반값만 받았다. 미국과 무역전쟁 중이라 관광객을 캐나다에 더 많이 유입하려는 목적인지 대부분의 국립공원 입장료도 면제였다. 그것만 해도 여행 경비가 제법 절감되어 흐뭇했다.
다리를 건너 우리가 향한 곳은 이 섬의 주도인 샬롯타운이다. 샬롯타운의 중심가에 여행자 안내센터가 있고 그 근처 워터 프린스 코너샵이라는 맛집이 있어서 그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랍스터가 푸짐하게 꽉 찬 랍스터 롤과 조개찜, 해산물 크림 차우더를 먹었다. 이곳의 크림 차우더가 유명하다고 했는데 정말 부드럽고 맛있었다. 곁들여 나온 비스킷도 겉바속촉, 빵순이 동생이 특히 좋아했다. 조개찜이라고 나온 것은 그냥 블루 머슬Blue Mussel을 삶은 것…웬만하면 시키지 말라고 하고 싶다. 모래가 지근거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인포센터에 들렀다가 문화센터도 가보고 다운타운의 오래된 상점들 거리를 구경하러 나섰다. 샬롯타운은 19세기부터 20세기의 오래된 목조 건물과 석조 건물이 단아하고, 항구를 끼고 있지만 비린내도 나지 않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21세기 다른 도시들의 번쩍거리는 휘황함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다. 그렇다고 해서 퇴락하고 낡은 것과도 거리가 멀다. 그 나름의 풍요로움과 안락함이 풍겨져 나오는 도시이다. 가로수 밑 그늘을 찾아 걸으며 거리 감상을 하는 중 내 심장에 문제가 생겼다. 너무 장시간 차 안에서 긴장하고 있던 탓인가, 아님 맛있다고 너무 많이 먹은 탓인가…한 달 동안 조용했던 심장이 다시 불규칙하고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런… 부정맥이 돌아왔다. 그늘을 찾아 잠시 쉬다가 다시 걷곤 했으나 정상으로 돌아오질 않는다. 항구 근처 잔디밭에 앉아 좀 쉬기로 했다. 30분이 지나도 회복이 안된다. 결국 동생이 차를 가져오겠다고 먼저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앞으로 남은 일정을 위해 안타깝지만 샬롯타운 구경은 이 정도로 하고 숙소로 일단 가기로 했다.
PEI에서 우리가 묵은 곳은 카빈디시 해변 근처의 카티지이다. 그곳에서 3박을 했다. 성수기라 그런지 3박 이하는 아예 예약을 받아주는 호텔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예약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거점을 두고 섬 곳곳을 여유롭게 돌아다니기로 했다. 카빈디시 해변은 그린 게이블즈의 빨강머리 앤이 고민이 있을 때마다 달려가던 붉은 절벽이 있는 그 해변이다.
숙소까지 가는 길은 경이로운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자동차 길 양쪽에 피어 있는 황금색 골든로드와 보랏빛 아스테르꽃들, 하얀 파스닙Parsnip 꽃들이 푸른 숲과 도로를 나누며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다. 이 섬이 농사짓는 섬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해 준 건 길 양옆에 펼쳐진 감자 밭과 호밀 밭, 옥수수 밭이 섬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넓고 많았기 때문이다. 하얗게 꽃핀 메밀밭과 감자 밭, 누렇게 익어 추수를 기다리고 있는 호밀 밭, 짙은 푸른색으로 한창 자라고 있는 옥수수 밭이 섬 어디에나 펼쳐져 있다. 이 하얗고 푸른 작물들 사이로 기름지고 붉은 땅 두렁이 눈길을 잡는다. 노랗고 하얀 야생의 꽃들이 만발한 들판 사이로 더없이 파란 하늘 아래 쨍한 햇볕을 받으며 대지만큼이나 붉은 갈래머리를 날리면서 앤이 달려가는 영화 속의 장면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숙소에서 잠시 쉬고 카빈디시 해변으로 나갔다. 아직 해가 많이 남아서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바닷물이 워낙 맑고 경사가 완만해서 어린아이들이 놀기에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 같다. 이 섬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꼭 저 바다에 들어가 마음껏 즐기다 가야할 것 같다. 미리 수영복을 준비해 오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길이가 1100km에 이른다는 이 해변은 고운 모래와 붉은 절벽으로 유명하다. 파도조차 없다. 파도가 없는 호수 같은 바다. 이 섬이 세인트 로렌스만 깊숙이 위치해 있고 이 해안이 대양 쪽이 아니라 내륙 쪽을 향해 있기 때문인 듯싶은데 파도도 없이 고요한 바다, 인간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한없이 맑고 깨끗한 바다는 처음이었다.
이곳에서 그린위치 해변까지 트레일 코스를 걸었다. 섬에서 가장 큰 사구이고 물 위에 떠있는 보드를 따라 걷는 구간도 있다. 온갖 생물들의 생태계가 잘 보전되어 있는 지역이다. 트레일 끝에는 식당과 샤워실, 화장실, 주차장 등이 있다. PEI에서 유명한 카우 아이스크림 가게도 있다. 이곳 사구 위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있는 식물들이 기특하기만 하다. 물 한 방울 품고 있을 것 같지 않은 붉은 모래 땅에서 푸르고 긴 잎을 길러내는 식물들, 빨간 꽃과 열매를 단 캣 로즈 덤불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다음 날 그린 게이블스 헤리티지 하우스에 갔다. 소설의 배경이 된 자연과 생활풍습, 작가인 몽고메리에 대한 자세한 기록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주변에는 소설에 등장하는 고스트 숲이나 학교터까지의 숲길이 산책로로 조성되어 있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태어나고 잠시 살았던 농장 터도 둘러보았다. 숙소 근처에 병 마을Bottle Village이라는 곳도 구경했다. 주로 다 쓴 포도주병을 모아 나무와 집을 꾸민 이색적인 구경거리를 제공한다. 건물마다 나름대로의 사연을 가지고 방문객의 기부를 부탁한다. 대체로 어려운 병에 걸린 아이들의 치료를 위한 모금을 하고 있다.
그린 게이블즈의 앤과 그를 창조한 루시 몽고메리는 소설 속의 주인공과 작가가 아니라 마치 하나의 인물처럼 느껴진다. 앤 이라는 인물이 너무나 생동감 있게 그려져서인지, 야생화가 만발한 들판이나 붉은 절벽을 볼 때마다 나는 그곳을 달리는 앤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앤이 달렸던 들판이 여기네”라고 감탄하는 나에게 동생이 옆에서 조용히 가르침을 주었다. “언니, 앤은 소설 속 인물이야.”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이나 이 섬을 찾는 사람들이나 모두 마치 앤이 실존인물이었던 것처럼 그 애에 대해 말하고 그 애의 방을 꾸며놓고 보여주고 구경하곤 한다. 심지어 소설에 나온 에볼리 마을도 재현해놓고 있다. 그 당시의 모습처럼 꾸며놓은 작은 상점들에서 식사와 아이스크림, 초콜릿, 기념품 등을 팔고 있다. 우리는 에볼리 마을에서 화덕구이 피자를 먹었고 선물가게에서 몇 가지 예쁜 기념품도 샀다. 값이 비교적 싸고 품질도 나쁘지 않다.
온갖 작물과 꽃들이 피어 있는 들판을 달려 어느 항구에 이르렀다. 마침 랍스터를 잡아 싣고 들어온 작은 배가 항구에 들어왔다. 싱싱한 랍스터를 배에서 내려 부두 옆에 세워진 저장창고로 옮기는 작업을 잠시 구경했다. 랍스터 잡이 배들이 생각보다 아담했다. 낚시 배 수준. 부둣가에 십여 개의 저장 창고들이 각자의 주인 이름을 달고 서있다. 부두 끝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랍스터 정식을 먹었다. 우린 둘 다 버터에 찍어먹는 것보다 랍스터를 있는 그대로 먹는 것을 좋아하는데 워낙 싱싱해서 사실 다른 맛을 가미하는 것이 불경스러운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외에 놓인 테이블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바다와 하늘이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것을 구경하며 즐긴 싱싱한 랍스터 만으로도 PEI에 온 보람은 충분한 것 같았다. 곁들여 나온 감자 칩 역시 이 섬에서 유명한 붉은 감자로 금방 튀겨내 자꾸 손이 가게 하는 맛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PEI의 매력은 섬 그 자체, 자연 그 자체이다. 그 순수한 아름다움에 온 마음을 내주고 온전히 가슴에 담고 벅찬 가슴으로 태초의 시간과 공간을 만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섬 주변을 드라이브하다 어느 해변가에 멈추어도 곱고 깨끗한 모래사장과 파란 바다를 만날 수 있다. 여름 휴가지로 최고인 곳이다. 그 바다를 즐기는 사람들도 바닷가에 홀로 앉아있는 것이 외롭게 보이지 않을 만큼만 있다. 안타까운 것은 PEI섬의 해안 절벽은 매년 조금씩 깎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 섬에 머무는 동안 페르세우스 유성쇼가 벌어졌다. 저녁을 먹은 후 우리는 숙소 앞마당 의자에 앉은 채 자동차에 머리를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높이 뜨기 전이라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선명했고 빛나는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본 동생이 한참 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카빈디시 해변 가에서는 더 많은 별과 유성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늙고 피곤한 우리는 숙소 앞마당에서 즐기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섬의 동쪽과 북쪽, 남쪽 끝을 보러 해안 도로를 돌았다. 섬이 끝나는 곳마다 등대와 풍력 발전기들이 설치되어 있다. 이 섬에서 사용하는 전력의 25% 정도를 풍력발전으로 생산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풍력발전소 박물관도 있다. 캐나다에서 자장 먼저 세워진 풍력 발전소가 이 섬에 있다. 풍력발전소 주변 해안을 따라 산책 코스가 있다. 커다란 바람개비가 돌아가는 들판 사이로 들꽃을 찾아 날아왔다 날아가는 나비들을 구경하며 걸었다. 햇볕이 너무 찬란해 등이 뜨거웠지만 해안 절벽에 서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는 즐거움도 있다.
다음날 우드랜드항에 가서 노바스코샤로 건너가는 배를 탔다. 배는 깨끗하고 사람들도 그다지 많지 않아서 쾌적했다. 1시간 반 정도 후에 노바스코샤 카리부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다음 목적지인 핼리팩스로 자동차를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