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언론학자 정준희 교수가 새로 시작한 유튜브 방송을 보았다.
[정준희의 논;]이라는 프로그램이다.
<당신에게 진실을 전해줄 언론인이 사라진다면>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첫 회는 이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된 배경, 동기 등을 설명하는 제작자 김어준 씨와의 인터뷰였고 두 번째 회는 언론의 사회적 책임, 그리고 이 프로그램이 지향하는 방향에 대한 정준희 씨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는 [논;]이 청취자들에게 하나의 확신이나 단정의 끝맺음이 아니라 쉼표 위에 마침표를 쌓아가는 과정, 더 나은 결론으로 나아가기 위한 임시적 이정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어떤 사건이나 이슈에 대한 진실을 찾아가는 우리의 과정에, 어떤 압력이나 위협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사실과 그 사건의 이면에 감춰진 부분까지도 모두 볼 수 있도록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언론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며 필수적일 것이다.
권력자들이 감추고 싶어 하는 사실을 파헤치고 숨겨진 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애쓰는 언론인들을 갖은 불이익과 협박, 때로는 생명의 위협으로 침묵시키는 짓은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고 있는 언론인들에 대한 계획적이고 잔혹한 암살은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
2023년 10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이 시작된 이후 이스라엘 군에 의해 살해된 기자들의 수는 기관마다 집계 차이가 조금 있지만 최대 300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중 절대 다수인 247명이 팔레스타인 출신 기자라고 한다. (UN과 국경 없는 기자회 추산) 실로 제노사이드라고 말할 만한 수준이며 최근에는 외국의 종군기자들 까지도 표적살해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기자들을 암살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가자 지구에서 일어나는 양민 학살 특히 어린이와 여성들에 대한 무자비한 살육이 세상 밖으로 특히 서방세계로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이런 기자 암살에 항의하는 의미로 주로 몇몇 독립언론(영국의 인디팬댄스, 프랑스의 미디어) 독일의 중요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룬트샤우 등과 국경 없는 기자회, 글로벌 비정부 조직 아바즈가 제안하여 9월 1일 각 매체의 첫 꼭지로 검은 화면을 내보내기로 하였다. 세계 50여 개 국 260여 개 기관이 참여했고 한국에서는 경향신문, 뉴스타파, 시사인, 프레시안, 뉴스 민, 뉴스 참, 단비뉴스 등이 동참했다고 한다. 안타까운 것은 주요 방송과 일간지 등은 참여하지 않은 것은 물론 이 캠페인에 대한 꼭지 기사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사실이다.
정준희 교수가 번역한 이 캠페인의 호소문 일부를 그대로 싣는다.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군이 자행해 온 언론인 살해가 만약 지금 속도대로 계속된다면 당신에게 이곳의 진실을 전해줄 언론인은 조만간 단 한 명도 남아있지 못하게 될 겁니다. ….(생략)
여기에서 [논;]의 부제가 나온 것이다.
<당신에게 진실을 전해줄 언론인이 사라진다면>
이 캠페인에 대한 소식을 듣기 전까지 나는 오마르 엘 아카드의 책 <언젠가 우리는 모두 (나는) 이 일에 언제나 반대했다고 할 것이다 One Day, Everyone Will Have Always been Against This>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오마르가 말하는 이 일(This)은 2023년 10월 이후 팔레스타인에서 자행되고 있는 비극적인 제노사이드를 가리킨다.
오마르는 이 책에서 진실을 전하는 언론인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묻는다. 물론 서구의 주요 언론매체들에 대해 던지는 비판이다. 더 나아가 서구 사회가 기초하고 있는 이상/이념이 그 사회의 기둥을 이루고 있는 기성 조직, 집단들-정치인, 언론인, 문학 예술계 인사와 단체 등-에 의해 얼마나 처절하게 배신당하고 유린되고 있는지를 고발한다. 이 책은 발간된 뒤 뉴욕 타임스 등 유력한 매체들에 의해 올해의 책으로 추천되었다.
오마르의 가족은 오마르가 어렸을 적 불법체포와 살해의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던 이집트의 어지러운 정치적 현실을 피해 여러 나라를 거쳐 캐나다에 이주했다. 그는 자신이 서구 사회의 ‘자유’라는 개념을 처음 경험한 순간의 놀라움과 희망에 대해 말한다.
같이 놀 동무가 없어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려 들어가서 <옛 대륙>에서는 금서로 지정되었을 법한 책들을 아무 감시나 제재, 체벌위협 없이 ‘무관심한 태도’로 대출해 주는 도서관 직원과의 해후가 처음으로 ‘자유’를 온몸으로 체험하는 계기였다고 말한다. 언어와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던 오마르는 기자로 성장했고 미국의 유력 언론사의 종군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처음 낸 장편소설 <아메리칸 전쟁 American War>이 세계적 히트를 쳤고 뒤 이어 낸 <What strange Paradise> 역시 여러 문학상을 받았다. <아메리칸 전쟁>은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위해 이념적 갈등을 부추기는 세력들, 오직 가족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려는 일념으로 반대세력을 처단하는 테러리스트로 성장하는 강철 같은 소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삶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독자는 교활하고 비겁한 권력자들의 거짓이 순진한 개인의 삶, 운명을 얼마나 비틀어놓고 있는지를 속수무책 지켜볼 수밖에 없다. 나는 이론적으로라도 그 운명을 정당화할 수 없는 무력감, 주인공의 선택을 마음속으로 지지할 수도 없는, 그러나 그 선택을 공감하지 않을 수도 없는 갈등에 휩싸였다.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의 세계가 벌이고 있는 내부적 분열과 갈등, 세계 지배를 둘러싼 거대 제국들 사이의 음모와 분쟁에서, 평범한 우리 모두는 피해자이며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마르의 소설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더 소개하고자 한다.
오마르는 2023년 10월,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폭격 삼 주 후 <언젠가 모든 사람이 자신들이 항상 이것에 반대했다고 말할 것이다….>라는 글을 트위트에 올렸고 곧 천만 명 이상이 이 글을 읽었다. 이 글은 이민자로서 그가 서구사회에 가졌던 믿음, 희망과 결별하는 선언이고 서구사회가 세워진 기반(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정의 안에서 보호받는다는 이념) 자체가 완전히 거짓이라는 통렬한 고발문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아프가니스탄에서 자행된 비인도적 행위들에 대해 경쟁적으로 보도하던 동료 언론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자행된 어린 소녀들에 대한 강간과 인종말살 지경에 이른 집단학살에는 왜 조용한가? 그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묻는다. 심지어 서방의 메인 방송들은 언제부터 인지 팔레스타인이라는 국가 이름 자체를 없애고 <가자지구>라는 명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알리고자 애쓰는 팔레스타인 출신 기자들이 학살당하고 있는데도 서방의 주요 언론은 왜 침묵하고 있는가? 팔레스타인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현지에 들어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일하고 있는 대부분의 기자는 기자 월급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보다 훨씬 많은 보수와 월등한 조건에서 일하는 주류 언론사의 기자들은 이스라엘군이 지정해 준 안전한 지역에 머무르며 그들이 주는 정보만 받아 송출하고 있지 않은가?
이뿐만이 아니다. 이스라엘 군에 의해 희생된 팔레스타인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문학작품은 수상이 취소되거나 무기한 연기되고 있다. 작가 자신의 소설을 영화화하겠다고 적극적으로 협상해 왔던 제작사는 슬그머니 프로젝트를 취소했다고 알렸다. 굶주리고 병든 아이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폭탄을 담은 하늘 대신 달과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예술이 진정한 예술인가를 묻기도 한다. 인간 정신의 비정상성insanity을 다루지 않는 예술도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가? 라며 문화예술계의 위선을 냉소적으로 비판한다.
아프가니스탄과 우크라이나, 이라크, 이집트,… 분쟁지역마다 자유와 인권을 말끝마다 내세우던 정치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자행되는 제노사이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2024년 1월, 유엔 국제사법재판소가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에 대해 재판을 받아야한다고 결정하자 미국, 캐나다, 영국, 기타 6개 주요국가들이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사업기구UNRWA에 대한 재정지원을 중단하고 그 기금의 사용을 중지시켰다. 이유는 기구 내 수많은 활동가(3만명) 중 몇몇이 하마스의 10월 7일 공격에 가담했다는 혐의-단순한 혐의 때문이었다. 그 결정을 내린 사람들은 자신들의 결정이 얼마나 더 많은 팔레스타인의 굶주린 아이들을 더 굶주리게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 보지 않아도 될 만큼 안전한 거리에서 여생을 편안하게 즐길 것이다. 혹여 누가 그들이 식사를 즐기는 레스토랑에 와서 기아로 죽은 팔레스타인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면 "문명인은 이런 무례한 행동을 하면 안 된다"고 나무랄 것이라고 비판한다. 트럼프와 공화당은 물론이지만 둘 중 차악인 민주당의 정치인들에게서도 "네 자신의 이익외에 무슨 일에 관심이 있느냐?"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오마르의 결론이다.
오마르는 자신의 기자로서의 경험, 어린 시절부터 이민자로서 겪었던 가족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서구사회에 대해 가졌던 기대와 믿음, 희망이 얼마나 처참하게 부서지고 절망으로 바뀌었는지를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쏟아부어 이 책을 썼다. 문장들은 아름답지만 분노로 뜨겁고 비통하고 절망적이기도 하다.
이 글의 끝에서 희망을 만날 수 있을까?
아마도 작가 자신도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 희망은 그의 질문과 비판에 대답해야 하는 우리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정준희 교수의 질문 역시 결국 우리 자신에게 행해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진실을 보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내가 믿어온 신념을 뿌리부터 흔드는 혹은 나의 안락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어지럽힐 수 있는 것이라고 해도? 아무도 진실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누가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쓸까?
오마르 엘 아카드가 트위트에 올린 글의 첫대목을 거칠지만 번역해 첨부하였다.
언젠가, 세상이 안전해졌을 때, 그것을 그것이라고 불러도(집단학살을 집단학살이라고 불러도) 개인적으로 아무런 손해가 없을 때, 책임을 져야 할 자에게 책임을 묻기에는 너무 늦어졌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모두 나는 이것에 항상 반대했었다고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