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크리스마스의 낭만

캐나다 버나비의 크리스마스 즐기기

by 다정한 세상

밴쿠버 공항에 내리자 우중충한 하늘과 가는 빗방울이 반겨준다.

최저 기온 영하 17도, 낮 최고 기온 영하10도의 추위와 뒤뜰과 지붕에 쌓이는 눈이 점점 높아지는 동네에서 6시간 만에 비가 내리고 영상 7도를 기록하고 있는 도시로 공간이동을 했다. 나는 택시에 타자마자 코트를 벗었다.

밴쿠버에 이민 왔던 어떤 이가 1년에 반이 비가 내리고 우중충한 날씨에 우울증이 생겨 도로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들었다. 내가 사는 동부지역은 겨울에 눈이 많고 혹독하게 추운 날도 있지만 맑고 쨍한 햇볕을 즐길 수 있는 날도 많다. 굳이 선택하라면 아마 나는 한국의 날씨와 닮아 사계절이 뚜렷한 동부지역에서 살기를 바랄 것 같다.

도착한 날부터 매일 비가 내린다.

어떤 날은 안개 같은 가랑비가, 또 어떤 날은 바람이 휘몰아치며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거리며 떨어진다. 그래도 장맛비 같은 장대비는 아직 못 봤다. 그나마 다행이다.

집에서 매일 하던 산책을 며칠 못했다. 기온이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도 눈폭풍만 아니면 매일 산책을 했던 사람이 이깟 비 때문에 집에 발이 묶여있는 게 맞나 싶어졌다. 빗줄기가 약해지는 틈을 타 코트에 모자를 둘러쓰고 동네 산책을 나섰다. 그 길에서 어느 집 길가 정원에 피어있는 장미를 보았다. 여름 장미처럼 탐스럽지는 않지만 어쨌든 철 지난 꽃을 피운 장미가 안쓰러우면서도 기특했다. 계절의 경계가 온도로 뚜렷하게 나눠지지 않은 탓인가 장미가 혼란을 겪고 있는 것 같다.

세상에는 언제나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사는 존재들이 있다. 세상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관점이나 방법이 조금씩 다른 존재들,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고 표현하는 방식이 다른 존재들, 진화의 역사를 보면 그런 존재들이 다음 단계로의 진화를 이끌었다.


며칠 후 이른 저녁을 먹고 아이들을 따라 버나비 문화센터에 '호두까기 인형' 공연을 보러 갔다. 크리스마스 시즌의 단골 레퍼토리를 문화센터 댄스클럽 회원들이 준비해서 올리는 공연이었다. 비록 오케스트라 대신 오디오로 틀어놓은 연주에 수준 높은 공연이랄 수는 없었지만 출연자들을 응원하러 온 가족, 친구들의 열기로 관람석은 매진되었다. 소소한 즐거움을 오랜만에 맛본 저녁이었다.

다른 날 저녁에는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기로 했다. "비가 제법 내리는데 시장 구경을 간다고?" 했더니 사위가 대답한다. "네 여기는 매일 비 와요. 비 와도 즐길 건 즐겨야 돼요." "그래, 그럼 가 보자." 하고 따라나섰다. 작년 봄 지역 화가들의 그림 전시회가 열렸던 문화센터에서 1940년대 최초의 여성 사진작가의 사진 작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최초의 여성 전쟁 종군 사진작가이기도 했던 선구적인 여성의 사진 전시회가 나름 흥미로웠다. 건물 앞마당에는 갖가지 음식과 장식물, 토산품을 판매하는 작은 노점들이 둘러서 있다.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비에 비춰 더 반짝이는 것 같기도 했다. 우산을 쓴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자 점점 더 많아진다.

아이들이 꼭 먹겠다고 작정하고 온 독일식 족발 가게를 찾았다. 대기 줄이 너무 길다. 한 시간쯤 기다려야 된다고 해서 포기하고 돌아섰다. 광장 건너편 건물로 들어가니 건물 안 작은 공터를 아이스 링크로 꾸며 남녀노소 어울려 스케이팅을 즐기고 있다. 누가 비 내리는 밴쿠버를 우울하다 했는가... 다 마음먹기 나름인 것을.

주말에 포트 코퀴틀람에 있는 미네카다 공원Minnekhada Regional Park에 트레킹을 갔다. 작은 호수 주변, 경사가 완만한 코스를 골랐다. 주변에 산불로 탄 나무들이 간간이 보였다. 그래도 강수량이 많은 지역이라 큰 둥지의 나무들은 껍질만 타고 말간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 채 서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1시간 정도 3km를 걸었는데 비가 간간이 내리는 미끄러운 숲길, 바윗길을 걷다 보니 땀이 나기 시작했다. 비가 내려도 할 건 다 한다는 아이들을 따라 하다 보니 겨울의 밴쿠버가 나름 멋있어지기 시작했다. 공원 주차장 근처에 오래된 별장 Lodge이 있는데 마침 방문객에게 개방이 되어 있어서 잠시 둘러보았다. 지금도 주말에는 개방이 되고 결혼식이나 다른 모임, 파티 등을 위해 빌려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관리가 잘 되고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중앙 홀에 이르기까지 정성스러운 크리스마스 장식이 예쁘다. 홀은 천장이 높은 전통적인 카티지 형태다. 붙박이 나무 장 속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크리스마스용 음악이 잔잔히 흘러나오고 있고 벽난로에서 장작 타는 소리가 후드득 거리며 오래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한껏 풍긴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층에는 고풍스럽게 꾸며진 침실과 거실이 여러 개 있다.

돌아오는 길에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집 전체를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뒤덮은 가게를 보았다. 아이들 손을 잡고 어느 부부가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아직 가게가 문을 열지 않은 시간이라 밖에서 사진만 찍고 지나쳤다. 비록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기대하기 어렵지만 이 사람들은 나름대로 즐기는데 진심인 것 같다.



크리스마스이브 전날, 버나비 민속 박물관Burnaby Village Musium에 갔다. 일종의 민속촌 개념으로 버나비에 처음 정착했던 유럽인들의 생활을 재현해 놓은 작은 마을이다. 비가 잠시 멈춘 탓인지 방문객들이 많았다. 주차장이 만원이라 한 바퀴를 더 돌아서 겨우 빈자리를 찾았다. 민속촌 입구에 큰 나무 두 그루가 약간은 기괴한 장식으로 우리를 반겨준다. 둥지를 핏줄 같은 불빛으로 휘감은 나무와 붉고 푸른 불빛으로 으스스한 영령을 비추는 듯한 나무가 입구 양쪽에 서있다. 크리스마스에 핼러윈 분위기를 합쳐놓은 걸까?

우체국, 대장간, 베이커리, 양품점, 식료품 가게, 학교 등 건물들이 아기자기하게 장식들을 하고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회전목마를 타고 싶어 하는 만년 어린애 같은 사위의 청을 거절하고 극장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크리스마스 기념 빈티지 영화를 상영 중이다. 호기심이 발동해 들어가 보았다. 3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 사람들이 제법 차 있다. 우리가 들어갔을 때 상영되고 있는 영화는 1912년에 제작된 <크리스마스에 일어난 사건>이다. 흑백의 무성영화로 한 막이 시작될 때 간단한 자막이 설명으로 나온다. "산타가 칠면조를 잊었어요", "산타가 올해는 너무 가난해요" 등이다. 어린아이들이 많아 경제적으로 어려운 한 가정과 욕심 많고 불통인 늙은 영감과 착한 부인이 사는 옆집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을 담았다. 어떤 스토리가 전개될지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갔다. 음향은 삐걱거리는 바이올린 두 대가 극에 긴장을 불어넣거나 화목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하거나 한다. 100년도 더 된 옛날, 크리스마스에 가족들이 함께 보았을 이 오래된 영화를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즐거웠다.

영화관을 나와 이곳저곳 둘러보며 사진을 찍었다. 베이커리와 양장점을 들어가 보고 소박했던 옛사람들의 삶을 잠시 엿보았다.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도시를 연결했던 기차가 전시되어 있는 기차역이다. 사람들이 올라가서 내부에 앉아 볼 수 있고 경적을 울리는 줄도 잡아당겨 볼 수 있다.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는 객실의 벽과 의자들이 고풍스럽고 예쁘다.

캐나다에 이민을 하고 첫해, 몬트리올에 살림을 차렸던 우리는 연말이 다가오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국 땅의 쓸쓸함이 크게 느껴졌던 것 같다. 생전 크리스마스를 남의 집 일로만 여기던 남편이 크리스마스날 웬일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시내구경을 하자고 했다. 애들과 생전 크리스마스 선물이나 카드를 주고받는 일도 없었고 가족 중 나만 빼고 세 명의 생일이 크리스마스 전에 옹기종기 모여있어 생일 축하 음식과 생일 축하 케이크로 연말을 넘기곤 했는데 별일이었다. 아무튼 신나 하는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서울의 명동거리나 광화문 거리의 복작거리고 반짝이는 불빛을 기대하며 몬트리올의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그러나 왠 걸, 이미 다운타운에 도착하기 전부터 길거리는 어둡고 적막했다. 몬트리올의 번화가라는데 도착했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긴 거리, 상점도 모두 문을 닫은 휑한 거리에서 우리는 완전히 길 잃은 고아들처럼 막막한 기분에 휩싸였다. 밤새 잠들지 않는 연말의 서울 거리와 이렇게 다를 수 있는가. 그 시간에 모두 가족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있을 거라는 이민 선배들의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그 때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후 한 번도 챙겨주지 않았던 날의 즐거움을 아이들 덕애 맘껏 누리고 있는 나는 고집 셌던 남편에게 잘못을 돌리며 비 내리는 버나비의 크리스마스 낭만에 흠뻑 젖어보려 한다.

조그마한 도시 버나비, 도시 곳곳에서 펼쳐지는 작은 행사장을 찾아 소박한 즐거움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어서 한달 내내 내리는 비가 우울하지 않을 수 있는 낭만의 도시로 탈바꿈한 것 같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프랑스식 특별한 밥상 - 고기와 치즈 보드charcuterie & cheese board와 함께 약간의 와인을 즐겼다. 냉장고에는 내일 저녁 밥상을 위해 딸이 재어놓은 커다란 칠면조 한 마리가 자리잡고 있다.

크리스마스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가족과 함께 나누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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