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공감의 깊이를 위한 변주
켄 리우Ken Liu는 유명한 SF소설 삼체 시리즈를 중국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작가이며 근래에는 노자의 <도덕경>을 길고 어려운 주석 없이 단순하고 원전에 충실한 아름다운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번역한 도덕경을 왜 다시 번역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도덕경>의 모든 번역은 '우리가 공유하는 큰길' 위에 번역가가 남긴 하나의 발자취일 뿐이며, 모든 독자는 그 발자취를 따름으로써 도에 이르는 자신 만의 길을 만들어가야만 한다.
중요한 것은 노자가 언어에 대한 집착, 즉 살아있는 지혜 자체가 아닌 단지 그림자나 흔적에 지나지 않는 것에 대한 집착을 대체로 경멸했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켄 리우는 특히 '번역'에 대해 나름의 강력한 의미를 부여한다. 단편집의 서문에서 작가는 언어를 통한 현상 또는 생각의 표현과 전달이 과연 어느 정도의 진실을 담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한다.
하나의 사건이나 생각을 입으로 내어 말하는 순간 그 사건 혹은 생각의 실재reality는 사라지고 철저히 화자의 개인적 경험을 표현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은 물론 인체의 감각기관과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뇌의 신경구조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것이 말이 되어 나오는 순간 그가 이미 가지고 있는 문화적 인식에 의해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 그와 별도로 어떤 말이 일단 화자를 떠나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과정-이것을 작가는 번역translation이라고 부른다- 역시 그들 사이의 시간적, 공간적 차이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작가는 소통이라는 모든 행위는 번역의 기적이라고 말한다. 당신이 내 글을 읽을 때 마음속에 드는 생각이 그 글을 쓰고 있을 때 내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과 같은 것이라고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당신과 나, 우리의 의식이 가진 감각적 인식의 질감은 마치 우주의 양 끝에 있는 두 별만큼이나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이 당신의 마음에 가닿는 긴 여정 동안 문명의 미로를 헤치고 번역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나는 당신이 나를 이해한다고 생각하고 당신도 당신이 나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리라고 본다. 우리의 마음은 비록 짧고 불완전하지만 서로에게 가 닿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세상을 조금 더 친절하고 밝고, 따뜻하며 인간적으로 만드는 것 같지 않은가? 우리는 그런 기적을 위해 살고 있다.
지금 소개하는 단편집 <종이 동물원과...>의 머리말 격에 해당하는 첫 번째 단편 <고급 지적 생물종들의 책 만들기 습성 The Bookmaking Habits of select Speices>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의 첫 단계를 담고 있다.
우주의 모든 지적 존재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났던 사건들, 경험이나 지혜가 시간의 물결에 의해 변형되고 희미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한 시점에 고정되는 것-물체'로 만들었다. 그것이 책이다. 이 단편은 외계인들이 역사를 기록하는 방법을 소개하는 형식이지만 각각의 방법의 차이나 우수성을 비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어떤 사건 혹은 생각이 역사로 기록된 후 시간이 흐르면서 원래의 사실이 어떻게 변하는지, 어떻게 희미해지고 어떻게 응축되고 어떻게 번역되는지 등, 실제 일어난 사실과 기록의 관계, 그리고 기록을 해석하는 행위에 대한 탐구이다.
이 단편을 처음 읽었을 때 사실 좀 낯설었다. SF장르인 것 같긴 한데 전체 구조가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어떤 책의 주석처럼 느껴지는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네뷸라와 그레고리 스터전상의 최종후보에 올랐다.
두 번째로 실린 <상태변화State Change>는 태어날 때 각자의 생명의 본성을 상징하는 물질을 갖고 태어나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얼음 큐브나 담배 몇 개비, 소금 등 각자의 생명의 성질이 다르고 그 생명이 사라지지 않도록 자신의 활동 양태나 장소를 스스로 규제해야 하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단편에서 작가는 자신의 한계를 지키며 살아온 존재들이 그 한계를 뛰어넘을 때, 즉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을 때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의미, 관계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종이동물원과 다른 이야기들>에 실린 15개의 단편들은 전형적인 스토리텔링이 아닌 다큐나 주석서 같은 구조를 가지기도 하고 판타지, 공상과학, 공상과학 누아르, 마술적 리얼리즘, 대체 역사와 같은 다양한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형식을 띠고 있다. 중국에서 태어나 열한 살에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중국 및 동아시아의 전통적 문화, 가치, 언어를 깊이 이해하고 서구사회에서 그 의미를 재해석하고 적응하기 위해 노력한 작기이다. 이 단편집에도 그러한 노력들이 엿보이는 작품들이 많다.
아메리카 중. 서부 개척시대 중국인 노동자들의 삶과 동부지역에서 이주해 온 백인 가족이 만나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이해하며 폭력적 무뢰배들로부터 공동체를 지키는 이야기에는 관우와 화타, 조조의 이야기들, 중국인의 음식에 대한 이야기들이 섞여있다. 이 단편 <세상의 모든 맛 All the Flavors>은 네뷸라 상 최종후보에 올랐다.
<송사와 원숭이 왕 The Litigation Master and the Monkey King>은 청제국 건설 초기 양주지역에서 벌어진 10일간의 대량 인민학살을 기록한 책-양주성 생존자 양수초가 기록한 '양주십일기'를 둘러싼 이야기이다. 민심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청 황제의 잔혹한 행위를 비밀에 부치고자 했던 권력자와 그 비밀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그 책을 일본으로 빼돌리는 일을 도운 한 평범한 촌마을 소송 대리인에게 닥치는 가혹한 운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은 실제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일본에서 발견되어 돌아온 후 청제국의 멸망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고도 한다. 역시 네뷸라상 최종후보에 오른 작품이다.
<태평양횡단 터널 약사 A Brief History of The Trans-Pacific Trunnel>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에 의해 점령당한 타이완 한 섬에서 터널 공사 노동자로 취업한 한 남자의 외로운 삶에 대한 이야기이며 <파자 점술사 The Literromancer>는 타이완에 주둔한 미군 정보원의 어린 딸과 우정을 나누던 파자 점술사 가족의 우정과 배신을 다룬 작품이다.
<레귤러 The Regular>와 <천생연분 The Perfect Match>은 재미있는 공상과학 누아르물이라고 할만하다. 이 두 작품에서 작가는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선택의 자유, 자기 결정의 자유를 어떻게 제한하고 감시하는지, 편리함과 효능성에 익숙해진 인간이 자신의 자유 의지와 본능적, 직관적 판단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과연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의지가 있는지, 더 나아가 기술이 과연 그것을 허용할 것인지 등에 대해 묻는다.
약간 맥락은 다르지만 인류의 기술 발전에 따라 신화와 전설의 시대가 사라져 가는 상황에서 과거의 신화를 보존하고 살아가는 신비한 존재들의 적응, 함께 살기에 대한 신화 같은 이야기를 <좋은 사냥 Good Hunting>이라는 환타지적 단편에서 만날 수 있다.
<시뮬라크럼 Simularcrum>은 딸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경, 신뢰가 배신과 경멸로 변화하게 되는 사건을 홀로그램 보다 더 발전된 시뮬라크럼이라는 기술을 배경으로 그린다. 이 작품은 세월이 흐르면서 변화하는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각자의 이해와 오해, 소통의 부재와 아집, 변화를 거부하고 과거의 아름다운 관계에 시간을 붙들어 놓고 싶은 욕망의 부질없음을 SF 형식을 빌어 그린 작품이다.
이 외에도 켄 리우의 단편들은 하나하나 여러 가지 생각할 점이 많은 의미 있는 주제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문제의식은 결국 개인의 주관성과 소통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건이나 생각, 경험이 고정된(물체화된) 실재가 아니라 그것을 경험하는 개인과 시간과 장소에 의해 제한되는 것이라는 대 전제 아래 개인들 사이의 소통 communication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거나 배신할 수 있는지를 다양한 폭과 깊이에서 다루는 작품들이 많다. <상급 독자를 위한 비교인지 그림책 An Advanced Readers' Picture Book of Comparative Cognitiin>은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변주한 단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편에는 주석의 형식과 스토리텔링 형식이 중첩되어 있다.
우리에게 남는 기억은 온전한 형태의 전체가 아니라 압축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 기억의 불완정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진 진실성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처음의 기억은 상실되고 미래의 기억을 담기 위해 준비하는 텔로지 안들 Telosians, 서로에게 끌렸던 두 개체가 하나가 되기 위해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길수록 각자의 개성을 조금씩 상실하고 결국은 애초에 서로에게 끌렸던 개성이 파괴되고 마는 모순 속에 살고 있는 에솝트론족Esoptrons, 다가오는 대재앙을 피해 사랑하는 아이들과 그들을 가르치고 보호할 임무를 띤 소수의 성인을 태우고 떠난 우주선에서 살고 있는 더리얼족 Thereals...
그들에게 생각과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또는 삶의 과정에서 행하는 선택에 의해서 점점 희미해지고 소멸한다. 그렇다고 해서 소멸하는 것에 대해 슬퍼할 필요는 없다. 결국은 우주의 모든 존재는 우주의 죽음이라는 '공void'으로 사라질 필연적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그것이 한순간이든 혹은 영겁의 시간에 걸친 것이든.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라지는 운명 앞에서라도 뭔가 이름이 붙여질 만한 가치를 가진 지적인 존재가 가진 생각이라면 그 사상(생각, 역사)은 우주 그 자체만큼 위대하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또한 이 단편에는 이 책의 다른 단편들-<물결 The Waves>, <무상 Mono No Aware>-에 연결될 수 있는 다양한 주제와 사건,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 단편들은 기억과 관계, 다시 말해 과거가 현재에 또 현재가 미래에 미치는 영향과 관계에 대해 더욱 깊이 있게 탐구하는 일련의 변주 혹은 연작 시리즈물의 성격도 조금 갖고 있다. 나는 이 단편에서 묘사되는 기억의 변주들이 한 편의 수채화 같기도 하고 한 편의 동화 같기도 해서 깊이 인상에 남았다.
<물결 The Waves>과 <무상 Mono No Aware>은 SF장르의 단편들이다.
지구를 떠나 새로운 정착지인 버지니스 61 Verginis61으로 향하는 우주선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물결>이라는 단편은 가족의 분리와 결합에 대한 이야기이다. <바다 거품 Sea Foam>이라는 우주선은 새로운 우주 식민지를 찾아 가장 먼저 지구를 출발했지만 출발 당시의 기술적 한계 때문에 가장 늦게 목적지에 도착한다. 수백 년이 걸리는 항해 동안 지구에서는 더 이상 늙지 않고 영원히 현재의 상태로 사는 것이 가능한 바이러스 임플란트 기술을 개발한다. <바다 거품>호의 사람들도 지구와의 통신을 통해 그 기술을 시행할 수 있게 된다. 다만 더 이상 늙지 않는 것을 선택한 부모의 아이들은 우주선 안에서의 한치의 여유도 없이 계산된 생명유지 자원의 한계 때문에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아이로 남아있어야 한다. 영원히 늙지 않는 길을 선택한 아내와 인간다운 자연스러운 죽음을 선택한 남편, 엄마의 선택을 지지하고 영원히 아이로 남기를 선택한 아들과 아빠의 선택을 따라 어른으로 자라고 죽음을 선택한 딸, 그들이 어떻게 서로의 선택을 이해하고 관계를 유지하는지도 흥미 있는 지점이지만 작가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마침내 도착한 버지니스 61에서 그들을 맞이한 존재들은 이미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훨씬 더 벗어난 존재들이다. 인간의 몸이 지닌 한계를 합금으로 만들어진 기계 장치들로 대체함으로써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조차도 개개인의 두뇌의 경계를 벗어나 하나의 우주로 통합시켰다. 그것을 '싱귤레리티Singularity' 라고 부른다. 이 싱귤레리티는 인공적이며 동시에 유기체이기도 하다. 퀀텀 컴퓨터처럼 한 순간에 수십억 년의 인류의 정보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개별적 신체를 가진 존재로 구현될 수도 있다. 사람들은 하나씩 모두 기계적 인간이 되는 길을 선택한다. 마지막까지 인간의 몸을 보유하고 있는 엄마는 과거 영생의 몸이 되기 위해 바이러스 임플란트를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온기가 느껴지는 몸, 인간의 과거 문화에 대한 애착 등 때문에 기계인간이 되기를 꺼린다. 그러나 자신의 딸의 딸의 딸에게 수 세대를 거쳐 들려준 이야기- 편안한 육지를 버리고 보트 하나에 딸을 싣고 바다를 떠다니는 모험을 선택했던 자신의 부모의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어 개체의 기계인간으로 찾아온 손녀딸을 통해 모든 인간이 하나의 의식을 가진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는다. 결국 그녀는 인간의 몸, 개인의 의식과 가치를 상실할 것에 대한 두려움을 거두고 과거의 수많은 자신의 자녀들, 미래의 자녀들과 진정한 가족이 되는 길을 선택한다. 이 작품은 네뷸라상 최종후보에 올랐다.
우주 자체가 하나의 의식이며, 개별 두뇌에 제한되지 않는 것이며, 개별 두뇌는 단지 우주에서 하나인 의식Consciousness에서 스스로 받고 싶은 정보를 수신받는 리시버라는 지력과학 Noectic Science의 '비지역적 의식 Non local consciousness' 이론과 비슷한 논리를 차용하고 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댄 브라운의 최근 소설 <비밀 중의 비밀 The Secret of Secrets>라는 작품을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다.
<무상>은 한 사람의 삶이 거대한 우주라는 무대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추구한 작품이다. 혹은 도도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듯한 우리의 삶이 어떤 순간, 어떤 자리에서 내린 결정, 선택에 어떤 의미가 주어질 수 있는지를 탐구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해머 Hammer라는 운석이 지구와 충돌해 지구의 멸망이 목전에 닥친 상황, 일본 정부는 이에 대비해 건조하기로 약속한 탈출선의 준비에 실패한 사실을 국민에게 감춘다. 세계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 다가오는 재앙을 피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 절망에 빠진 사람들로 인해 세계는 폭동과 약탈로 어지럽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조용히 살던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다가올 운명을 기다린다. 이러한 일본인의 태도를 소년은 서구인들이 평가하는 것처럼 '포기give up'가 아니라 '덧없음/무상transience'이라는 전통적 정서를 내재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과학자를 친구로 둔 엄마 덕분에 탈출선 <희망에 찬Hopeful>에 홀로 타게 된 이 어린아이가 주인공이다. 우주선에서 오랜 시간 생활하며 청년이 된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기억들을 되살리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 그가 우주선의 태양열 돛을 수리하기 위해 생명을 거는 결단을 내리고 우주로 날아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무상>의 참 의미를 읽을 수 있다. 'Mono No Aware'는 불교적 개념으로 저자는 이 작품에서 '이 세상의 생명은 모두 덧없이 흐르는 존재-Transience of all things in Life'라는 인식을 주인공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일본인들의 사상적 전통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정서를 작가는 일본의 단시들을 통해 전달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바둑 역시 세상에서 하나의 돌인 우리의 한 점, 즉 우리의 한 선택이 세상을 만들고 구원하는 영웅적 행위임을 말한다. 특별한 자질과 능력을 지닌 영웅적 존재가 아니라 바둑판에 놓인 한 점 한 점의 돌이 세상을 잃게 할 수도 있고 얻게 할 수도 있다는 것, 하나의 선택을 하면 다른 선택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소년은 아버지에게서 바둑을 배우면서 깨우친다. 작가는 세상의 모든 존재는 흘러가는 것, 사라지는 것이어서 집착할 필요가 없지만 또한 개개의 존재가 세상을 구성하는 똑같은 한 점 한 점의 돌이라는 깨달음을 통해 주인공의 사상을 서구적 영웅주의와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휴고상을 수상했다.
이 단편집의 표제작인 <종이동물원>은 미국에 결혼이민을 한 중국인 어머니와 그녀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엄마와 엄마가 만들어 준 종이 동물들과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세상의 전부였던 아이가 학교에 가고 외부 세계와 접촉하면서 그 세계가 산산이 무너지고 부정당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소수자로서 미국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어머니의 문화적 유산은 물론 그 관계까지도 부정하게 되는 아들, 둘 사이에는 완전히 대화가 끊기고 어머니는 고립된 외로움 속에서 생을 마친다. 이 단편은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민 가정의 자식과 부모 세대의 갈등, 문화적 이질성과 주체성의 문제, 소통과 공감을 통한 관계의 회복이라는 작가의 주제의식이 어떤 작품보다 선명하고 완성도 높게 그려진 작품이다. 그래서 판타지 문학 역사 상 유일하게 휴고상, 네뷸라상, 세계환타지상 세 개를 모두 받은 작품이다.
<종이동물원과 다른 이야기들>의 전체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 마지막에 수록된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남자: 다큐멘터리 The Man Who Ended History: A Documentary>이다. 이 작품 역시 휴고, 네뷸라, 테오도르 스터전 등 3대 판타지 문학상의 최종후보까지 올랐다.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일본의 731부대에 의해 자행된 인체실험의 잔인하고 공포스러웠던 사건을 대하는 사람들의 경험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엮은 소설이다. 피해자와 가해자, 그들의 후손들, 옹호하는 사람과 방관자들, 전문가들, 정치인들… 그들 모두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하나의 사건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입장을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이 다큐적 증언 혹은 주장들은 하나하나가 지금도 우리가 논쟁적 사건에 대해 일상적으로 듣고 읽을 수 있는 입장들을 대변하고 있어서 시사하는 점이 크다. 즉 홀로코스트나 위안부, 강제징용문제, 광주민주화운동, 세월호 사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 등을 둘러싼 서로 다른 여러 증언과 논쟁 등을 바로 상기시키는 주장들을 만나게 된다.
이 논쟁들을 종식시키기 위해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직접 볼 수 있는 포톤 photon 기술을 개발한 중국인 과학자 에반이 있다. 그는 무엇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를 직접 보기 위해 이 기술을 사용한다. 다만 문제는 그가 그때의 사건을 목격하면 그 역사는 다시는 복원될 수 없이 영원히 지워진다는 것이다.
이 설정이 의미하는 것은 역사적 사건 혹은 경험은 궁극적으로 개개인의 일회성 경험이라는 한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일 것이다. 사람들이 사실을 직접 보기 위해 이 기술을 쓰면 쓸수록 과거의 사건은 포톤으로 분해되어 우주로 날아가 버리고 만다. 역사가 지워지는 것이다.
이 단편은 에반의 부인 키리노의 내레이션이 끌고 간다. 에반은 만주 주둔 일본군의 만행에 희생당한 희생자의 자손이고 그의 부인인 키리노는 731부대의 책임자였던 군의사의 손녀이다. 에반은 자신이 발명한 기술이 오랜 논쟁을 종식시키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를 지워버리는 결과만 낳았다고 절망하며 죽는다. 에반이 죽는 순간까지도 남편에게 자신이 가해자의 손녀임을 밝히지 못한 키리노는 자신의 비겁함, 남편의 신뢰에 부응하지 못한 나약한 사랑을 후회한다.
키리노의 독백을 통해 작가는 진실은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공감에 의해서만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가해자에 대한 손쉬운 악마화나 비판이 아니라 그들이 왜 그런 짓을 했는가에 대한 이해를 해야만 그들도 자신들이 행한 짓이 피해자들에게 얼마나 잔인하고 고통스러운지를 이해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과정을 공감 Empathy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진실은 에반이 믿은 것처럼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주 공간에 흩어진 포톤처럼 지금도 우리 사이에서 소리치고 유령처럼 함께 걷고 있어서 우리는 눈을 돌릴 수도 없고 귀를 막을 수도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 말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위해 증인이 되어주고 말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가 있을 뿐이다.(키리나의 마지막 독백)
존재의 무상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순간 한 순간 살기 위해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선택하며, 사랑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그 선택이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혹은 그 사랑이 미움으로 변한다 하더라도, 믿음이 배신으로 돌아온다 하더라도 삶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며 변화하고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그 경험과 그때의 감정에 매어있을 수만은 없다. 또 인간은 각자 가치와 입장이 다른 개인이지만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다. 이것을 이해하면 우리는 소통할 수 있고 공감하며 진실이 계속 살아나게 할 수 있다. 번역의 기적이 일어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켄 리우는 최근에는 단편에서 장편 쓰기로 돌아섰다. 그의 첫 장편 <제왕의 위엄The Grace of Kings>은 중국의 고대 영웅인 항우와 유방의 설화를 재료로 삼은 소설로 <민들레 왕조 연대기The Dandelion Dynasty> 3부작 중 첫 번째로 나온 책이다. 우리에게는 비교적 익숙한 초한지의 영웅들을 연상시키는 인물들과 에피소드들이 나온다. 1권에서는 영웅들의 시대가 저물고 민들레로 상징되는 민초의 시대가 열리는 역사적 필연성 내지는 시대정신을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