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세상을 위해 추천하는 책(1)
태국과 밴쿠버를 거쳐 두 달 만에 집에 돌아오니 이곳은 겨울이 한창이다.
뒷마당은 눈이 거의 무릎 높이까지 쌓여 있고 먹이를 찾는 청설모들의 발자국만 이리저리 어지럽다. 날씨도 춥지만 들려오는 세상 소식들도 한기로 몸서리치게 만드는 요즈음 오랜만에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소설 몇 권을 읽었다. 그중 두 권을 소개하기로 했다. 약하고 별로 가진 것 없지만 엄혹한 현실을 헤치고 조금은 나은 미래의 삶을 향한 희망을 만들어 나가는 평범하지만 특별한 사람들에 대한 얘기이다.
영국의 유명한 작가 클레어 키간이 쓴 <이렇게 사소한 것들>은 1980년 중반 북아일랜드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부커상 후보에 올랐던 작품이다.
주인공 풀롱Furlong은 아내와 딸 다섯을 둔 가장이다. 비교적 풍족한 전쟁미망인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던 풀롱의 어머니는 누가 아버지인지 모르는 아기를 낳는다. 동정심이 많은 윌슨 부인은 하녀와 아기를 내치지 않고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하며 이들 모자에게 사람다운 삶을 살게 해 준다. 종교와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아무 부족함이나 걸림돌 없이 한가족처럼 생활했다. 윌슨 부인의 도움으로 기술학교까지 마치고 석탄회사에 취직한 풀롱은 에이린과 결혼해 다섯의 딸을 두고 평범하지만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사는 세상은 그렇게 평탄하지 만은 않았다. 영국은 대처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사회적 경제적 재편이 이루어지면서 기득권 세력과 노동계층 사이의 갈등이 첨예화되고, 북아일랜드는 독립주의자들(가톨릭)과 영연합주의자들(개신교)의 갈등이 완전히 종식되지 못한 상태로 공동체 사이의 갈등 요인이 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아일랜드 하층민들의 삶은 비참했고 형편이 조금 나은 사람들은 그나마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자신들끼리의 암묵적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다.
가족의 안정된 생활을 지키기 위해 매일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정해진 일상의 업무를 성실하게 해내는 풀롱은 일을 마친 후 잠깐의 휴식 시간에 혹은 저녁식사 후 고단한 잠에 떨어졌다 한밤중에 홀로 깨어났을 때 혹은 가족들과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만드는 번잡함 속에서, 항상 습관적으로 일상의 일을 되풀이하는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만들면서 그는 내일 어느 집에 언제까지 얼마의 석탄을 배달해야 하는지를 머릿속에 그린다. 이미 배달한 석탄과 나무 값은 또 언제까지 누구누구에게서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 그리고 내일은 또 그다음 날의 일을, 그다음 날은 또 그 다음다음 날 해야 할 일을 생각할 것이다.
그는 변함없는 일상이 매일매일 계속되리라는 생각에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은 중압감을 느낀다. 만약 이런 일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매일의 작은 친절들, 잘못을 고치고 혹은 고무시키는 일, 무엇인가를 말하거나 혹은 말하기를 거부하는 일… 이런 사소한 일들이 더해져서 한 사람의 일생을 이루는 것 아닌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에게 주머니의 잔돈을 다 털어주는 풀롱의 ‘여린 마음’이 혹시라도 자신들의 처지에 지나친 것이 되지 않을까 그를 다잡는 아내에게 그는 묻는다.
윌슨 부인의 친절이 없었다면-일반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아비도 모르는 아이를 임신한 하녀를 집 밖으로 내쫓았다면, 자신의 삶이, 어머니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마을의 큰 손인 수녀원의 세탁소에서 행해지는 참혹한 학대를 목격한 풀롱은 사업을 계속하는데 지장이 없으려면 못 본 척 눈을 돌리라는 아내는 물론 이웃들의 노골적인 충고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벗어난 작은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을 함으로써 나중에 자신의 집에서 아내와 대면할 때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을 알지만 오히려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한다.
그는 생각한다. 남은 일생동안 마음속에 자신이 안고 살아가야 할 최악의 일은 지금 ‘하지 않은 일’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을 선택한 순간 이미 최악은 지나갔다고.
그다지 길지 않은 이 소설은 지극히 평범한 한 가장이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책임, 의무를 수행하기 의해 최선을 다해 살지만 순간순간 내면 깊은 속에서 솟아오르는 삶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가족과 이웃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외면하지 않는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우리의 작은 행동들- 이렇게 사소한 것들이 모여 한 사람의 일생을 아름답게 만들고 새로운 관계(다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소설이다. 이 추운 겨울에 특히 크리스마스 선물로 좋은 소설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아일랜드의 막달랜 세탁소Magdalen Laundry는 1996년 마지막 남은 한 곳이 폐쇄되었다. 이 시설에서는 1만 명 이상의 소녀와 여자들이 비밀리에 감금되고 학대당하면서 혹독한 노예노동을 강요당했다고 알려졌다. 이 시설들에 대한 자료는 대부분 분실되거나 파괴되었고 접근 불가해서 그 전체 진상이 완전히 밝혀지지 못했다. 한 보고서The Mother and Baby Home Commission Report에 의하면 조사받은 시설 18곳에서만 9만 명의 아기들이 생명을 잃었고 일부 여성들도 목숨을 잃었다. 이들 시설들은 아이리시주와 손잡은 가톨릭 교회에 의해 재정지원을 받았다.(저자 후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