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친구에게 연회비가 높은 카드 하나를 소개받았다. 적지 않은 금액이긴 하지만, 하**호텔 2인 식사권이 지급되고 그 외 혜택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 호텔에서 2인이 식사를 하고 온다면 연회비보다 더 높은 식사비를 지불해야 할 터이니, 이건 꽤 괜찮은 선택이지 뭔가. 1년에 한두 번씩은 호텔 뷔페에서 기분을 내자며 둘 다 그 카드를 신청해 받았다. 혜택이 꽤 좋은 카드로 소문이 나서 신규 카드 가입이 막혔다는 얘기를 듣자 둘이 무척이나 뿌듯해했다.
그런데 그건 딱 첫해뿐이었다. 친구가 나나 호텔이든 동네든 뷔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뼛속까지 한국인인 우리는 스테이크나 샐러드보다는 보글보글 끓는 김치찌개나 닭볶음탕을 더 좋아했다. 둘째 해부터 두 장이나 생긴 호텔 뷔페 식사권은 자꾸만 외면하고 싶은, 해결해야 하는 숙제가 되어 버렸다.
어찌어찌 한 번은 다녀왔지만... 두 번째 방문을 미루고 미루다 그만 식사권 이용 만료일이 가까이 다가오고 말았다. 만료일은 3월 말이었고 3월 초에 우리는 그 식사권을 들고 사용을 고민하고 있었다.
"중***에 팔자! 팔아서 연회비라도 내면 손해 볼 거 없잖아!"
좋은 생각이라며 인터넷에 접속을 해보았는데, 그럼 그렇지. 우리 같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 호텔 식사권을 판매하는 글이 꽤 여러 개 올라와 있었고, 심지어 모두 우리보다 사용기한이 길게 남아 있었다.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우리 식사권을 판매하려면 가격을 한참 낮춰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 싸게 파느니 그냥 우리가 가자"
라며, 내가 그냥 포기하려는데, 친구가 갑자기 말했다.
"지금 하**호텔 전화해서 예약해. 곧 화이트데이잖아. 그날! 그날로!"
여자 둘이 화이트데이에 굳이 호텔을 왜....?라고 생각하면서 전화를 했다. 디너는 이미 만석이었지만 런치 타임은 아직 남아 있는 자리가 있었다.
"일단 예약을 하긴 했다만, 대체 그날 왜....? 가더라도 좀 한가한 날 가자. 북적거리는 날 말고. 온 세상 커플들이 다 기어 나오는 날에 너랑 나랑 굳이 거길 가야겠니?"
라는 나의 물음에 친구가 이렇게 답했다.
"식사권은 여러 개 올라와 있고... 우리 식사권은 사용기간이 짧게 남았으니까 같은 조건으로는 경쟁이 안되지! 우리 껀 3월 14일 화이트데이 식사권으로 내놓을 거야! 화이트 데이에 어디 갈까 찾아보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거거든!!"
화이트데이 런치타임에 예약이 되어 있던 우리의 식사권은 프리미엄이 붙었고, 우리보다 사용 기간이 길게 남아 있던 식사권들보다 오히려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다.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던 청년이 무척이나 설레는 표정으로 우리의 식사권을 가져갔고, 우리는 그 청년의 표정 때문에 뭔가 모르게 좋은 일을 한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식사권을 판매한 돈을 들고 둘이 죽고 못 사는 삼겹살집에서 고기를 구우며 나는 친구에게 찬사를 보냈다. 내가 사용기간만 바라보고 있을 때, 발상의 전환을 하고 식사권에 다른 부가가치를 얹어 가격을 올린 친구가 무척 대단해 보였다. 우리는 좋은 가격과 만족스러운 기분을 얻었고, 식사권을 구매한 그 청년은 화이트데이에 사랑하는 연인을 데려갈 폼나는 장소를 얻었다.
그날 삼겹살로 부른 배를 안고 잠자리에 누워 이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사용기간이 얼마 남지 않는, 객관적으로는 경쟁력이 떨어지는 이 식사권의 가치를 올려 거래하게 된 요인은 무엇일까
첫째 불확실성 제거. 이용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은 내 선택권을 넓혀주는 요인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내가 원하는 시간에 사용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불확실성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 불확실성이 제거되면 상품의 가치가 올라간다. 더군다나 연인들의 큰 행사날인 화이트 데이날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매력 있는 조건이었을 것이다.
둘째 새로운 가치부여. 사실 이 부분이 더 중요한데, 판매자 모두가 집중했던 식사권의 가치는 얼마나 오래 나에게 선택기간을 부여해 주는가였다. 기간을 늘릴 수 없으니, 나는 이미 이 시장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실제 이 식사권을 사용하게 될 소비자의 행동을 가만히 짚어보다 보면 새롭게 의미 있는 가치부여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 소비자의 니즈를 발견하고 그것을 적용해 상품의 가치를 올리는 것이 반드시 어마어마한 투자와 노력이 들어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오히려 소비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내 눈으로 목격하는 순간이었다. 안 되는 것, 못한 것을 보면서 낙심할게 아니라 조금만 시선을 바꾸면 기회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무렵 나는 한참 나이 마흔을 코앞에 두고 있었고, 세월이 지나며 쌓인 나의 경력과 나이의 무게에 숨이 막히던 참이었다. 젊음이라는 가능성의 무대에서 나름으로는 치열하게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삶의 완연한 중반부라고 느껴지는 마흔을 앞두고 나는 여전히 보잘것이 없었다. 나의 분야에서 대단한 업적을 이루지도 못했고, 다른 일을 시도하기엔 경력이 너무 무거워져 버렸다. 지극히 평범한 내 삶이 '너는 이제 여기까지'라고 나에게 그어준 선이 바로 저 마흔이라는 나이라고 느껴졌다. 이제 저 마흔이라는 문턱을 넘고 나면 모든 가능성의 문들이 닫히고 딱 그 안에서 뻔한 하루하루를 살아내며 시들어 갈 것만 같았다.
그런 나에게 사소하다면 사소한 이 일은 적지 않은 파장을 가져왔다. 객관적으로 나보다 더 멋있는 스펙을 가진 사람들이 즐비하지만,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다 보면 어딘가에서 새로운 기회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사용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식사권에 새롭게 부여된 가능성처럼, 어딘가 내 삶에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어줄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게 다라고 주저앉지 말고 찾아보기로 했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직장생활이 바빠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지만 관심이 가는 분야를 조금씩 두드려 본다. 그동안 살아낸 세월이 무거움이 아닌 힘으로 얹어질 그 무언가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