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냐 이후, 라이덴, 국제화의 새로운 본거지
중세 유럽 고등교육의 기원으로 흔히 언급되는 **볼로냐 대학교**는 법학을 중심으로 한 학문 공동체와 대학 자율성의 전통을 확립했다. 교수와 학생이 스스로 학문의 규칙을 정하고, 외부 권력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 했던 이 전통은 이후 유럽 대학사의 중요한 규범으로 작동했다. 그러나 볼로냐의 모델이 주로 학문 내부의 자율성에 초점을 맞췄다면, 근대 초기에 등장한 **라이덴 대학교**는 여기에 ‘국제화’라는 새로운 차원을 결합하며 대학의 역할을 한 단계 확장시켰다.
라이덴 대학교는 1575년, 네덜란드가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며 설립되었다. 이 대학은 가톨릭 교회의 권위가 지배하던 중세 대학 질서에 맞서, 종교개혁 이후 형성된 개신교적 관용과 학문적 자유를 제도화한 상징적 공간이었다. 네덜란드 국가는 신생 공화국의 정체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라이덴을 적극 지원했지만, 학문의 내용과 방향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않는 원칙을 택했다. 국가가 대학을 보호하되 지배하지 않는 이 선택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대학 자율성의 본질을 분명히 보여준다.
학문 구성에서도 라이덴은 전환점이었다. 철학과 신학이라는 전통적 중심 위에 자연과학과 의학을 적극적으로 포섭함으로써, 새로운 지식이 실험과 관찰을 통해 생산되는 장을 열었다. 이러한 흐름은 **파도바 대학교**의 실증적 의학 전통, **제네바 아카데미**의 종교개혁 사상, **파리 대학교**의 분과 학문 체계와 맞물리며, 볼로냐의 법학 중심 전통을 잇는 복합적 계보를 형성했다. 라이덴은 이 다양한 흐름을 하나의 제도 안에 통합해, 학문 간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와 교육을 가능하게 했다.
라이덴의 국제화는 부수적 기능이 아니라 대학의 핵심 정체성이었다. 유럽 각국의 지식인들이 종교와 국적의 장벽을 넘어 모여들었고, 네덜란드의 해상 교역과 함께 성장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네트워크는 라이덴을 세계 지식의 집결지로 만들었다. 식민지 시대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지식인들이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이곳을 찾았고, 대학은 언어·역사·자연·의학에 관한 방대한 지역연구 지식을 축적했다. 이 과정에서 라이덴은 단순한 유럽의 명문을 넘어, 세계 학문의 허브로 기능했다.
이러한 전통은 19세기 초 **훔볼트 대학교**로 이어지는 중요한 접점을 제공한다. 훔볼트가 제도화한 연구–교육의 통합과 학문 자유는, 라이덴이 축적한 관용과 자율성의 정신을 국가 차원의 설계로 끌어올린 결과였다. 라이덴이 자유로운 국제 네트워크를 통해 지식을 모으는 대학이었다면, 훔볼트는 그 성과를 ‘연구대학’이라는 보편적 표준으로 정식화했다는 점에서 두 모델은 단절이 아니라 연속선상에 놓인다.
오늘의 라이덴: 전통을 동시대적 국제화로 확장하다
오늘날 라이덴 대학교의 국제화는 역사적 유산에 머물지 않는다. 라이덴은 현재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600개가 넘는 대학 및 연구기관과 협력 협정(MOU)**을 맺고 있으며, 교환학생을 넘어 공동연구, 교수 교류, 박사과정 공동지도, 지역연구 네트워크 구축으로 협력을 확장하고 있다. 특히 개발도상국의 고등교육 발전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협력이 설계되어, 라이덴의 국제화는 경쟁보다는 연결과 역량 축적에 가깝다.
캠퍼스의 국제성 또한 일상적이다. 다수의 교수와 연구자들이 유럽을 넘어 아시아·아프리카·미주 지역 대학과 장·단기 순환 교류를 반복하고, 학생들 역시 학부와 대학원 단계에서 여러 국가를 오가며 학습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경로로 자리 잡았다. 국제화는 별도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대학 운영의 기본 방식이다.
이러한 구조는 네덜란드 정부의 정책적 지원과 맞물려 강화된다. 유럽 차원의 **에라스뮈스 프로그램**은 학생과 교수의 이동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네덜란드의 교육·연구 국제화 전담기관인 **Nuffic**은 대학 간 협력, 학위 인정, 글로벌 파트너십을 체계적으로 지원한다. 더 나아가 **Orange Knowledge Programme**을 통해 개발도상국 인재를 초청하는 동시에, 네덜란드 교수와 연구자가 해당 국가의 고등교육 현장에 참여하도록 장려한다. 핵심은 ‘두뇌 유출’이 아니라 경험의 순환과 네트워크의 축적을 국가 경쟁력으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한국 대학 국제화에 주는 시사점
이 지점에서 라이덴은 한국이 주목해야 할 중요한 비교 대상이 된다. 네덜란드는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국가가 아니지만, 다수의 대학에서 영어 강의를 제공하며 국제화에 전략적으로 투자한다. 그러나 그 초점은 ‘유학생 유치 숫자’에 있지 않다. 대신 연구의 자유, 영어 기반 교육, 정주 인프라를 결합해 우수 인재가 자발적으로 찾아오고 머무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역점을 둔다.
한국 대학의 국제화가 여전히 선발과 홍보, 단기 체류에 머물러 있다면, 라이덴형 국제화는 다른 질문을 던진다. 국제화란 얼마나 많은 학생을 데려왔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지식과 사람이 이곳에 모여 오래 머물며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가라는 질문이다. 볼로냐 이후 대학사에서 라이덴이 차지하는 위치, 그리고 그 국제화의 방식은 오늘날 한국 고등교육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다시 성찰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