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 출범 이후, 대학 국제화

볼로냐 프로세스와 에라스무스가 만든 새로운 질서

by Clara Shin

1993년 유럽연합의 출범은 고등교육 국제화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이전까지 대학의 국제화는 개별 대학 간의 교류, 혹은 각 대학이 선택적으로 추진하는 전략의 영역에 가까웠다. 그러나 유럽연합이 단일시장과 인적 이동을 본격화하면서, 대학 역시 더 이상 개별 기관의 판단에만 맡겨둘 수 없는 영역이 되었다. 고등교육은 국경을 넘는 이동을 전제로 작동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범국가적인 공동의 틀을 함께 만들고 이를 함께 수용해 나가는 체제가 필요해졌다. 대학 국제화가 ‘전략’에서 ‘체제’로 이동한 순간이었다.


이러한 전환의 시초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1999년에 시작된 볼로냐 프로세스다. 볼로냐 프로세스는 유럽의 대학을 하나의 동일한 제도로 만들겠다는 시도가 아니었다. 대신 학사–석사–박사로 이어지는 학위 구조를 유사하게 정비하고, 학점과 학위의 비교 가능성을 높여 학생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공부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대학 간 경쟁을 넘어서, 유럽 전체를 하나의 고등교육 공간으로 설계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제도 개편의 배경에는 이미 십여 년간 이어져 온 학생 이동의 경험이 있었다. 1987년에 출범한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은 유럽 대학생들이 다른 유럽 국가의 대학에서 일정 기간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한 대규모 교류 프로그램이었다. 에라스무스를 통해 많은 학생들이 국경을 넘는 학습을 경험했지만, 학점 인정과 학위 연계가 충분하지 않다는 한계도 분명히 드러났다. 볼로냐 프로세스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이동의 경험을 학업의 경로로 이어 붙이는 역할을 했다.


이후 에라스무스는 Erasmus+로 확대되며 학부생뿐 아니라 석·박사 과정, 교원, 직업교육까지 포괄하는 체계로 발전했다. 현재까지 누적 기준으로 1천만 명이 넘는 학생과 청년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에서는 국경을 넘는 학점 인정과 학생 이동이 더 이상 예외적인 경험이 아니라, 고등교육의 일상적인 일부가 되었다. 2023년 기준 프랑스에서는 15만명의 학생, 교사, 연구원등이 이 프로그램의 지원으로 해외에서 수학하거나 연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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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변화는 세계대학평가 체제의 확산과 맞물리며 더욱 공고해졌다. QS나 THE와 같은 세계대학평가는 국제학생 비율, 국제 교원 비율, 국제적 평판을 주요 지표로 삼았고, 이는 국제화를 대학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활발한 학점 인정과 이동성을 이미 경험한 유럽 대학들은 이 변화에 비교적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고, 국제화는 점차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고등교육이 작동하기 위한 기본 조건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유럽의 이러한 경험은 다른 지역에도 중요한 참고점이 되었다. 동아시아에서는 한국·중국·일본이 참여하는 캠퍼스 아시아 사업(Campus Asia)이 추진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세 나라 대학의 학생들이 각국 캠퍼스를 오가며 학점을 이수하고, 공동 또는 연계 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규모 면에서는 에라스무스에 비해 작지만, 출범 이후 누적 수만 명의 학생이 참여하며 동아시아형 고등교육 협력 모델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흐름이 글로벌 차원으로 확장되고 있다. UNESCO 글로벌 고등교육 학위인정협약은 고등교육 학위의 상호 인정을 전 세계적으로 촉진하기 위해 체결된 최초의 글로벌 협약이다. 현재 38개국이 이 협약을 비준했으며, 한국 역시 이를 비준해 2025년 7월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이는 고등교육 국제화가 지역적 실험을 넘어, 국제 규범의 단계로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유럽연합의 출범과 볼로냐 프로세스,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은 대학 국제화를 개별 대학의 전략에서 범국가적·초국가적 체제로 전환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제 국제화는 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공동의 틀을 만들고 그 안에서 어떻게 함께 성장할 것인가의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질문은 유럽을 넘어 아시아로, 그리고 한국의 고등교육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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