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 속 21세기 신분제
“아주 근본적인 대책이 생겼어요. 돈을 아주 많이 버는 거예요. 돈을 벌면 이 집부터 사겠습니다. 아버지는 그냥 계단만 올라오시면 됩니다.” 영화 속 기우의 마지막 다짐이다. 돈을 벌어서 집을 사는 것. 아주 ‘근본적인 대책’이긴 하다. 다만 영화일 뿐이더라도 잠시 현실적으로 생각해보겠다. 실제 박사장의 집이 어느 지역인지는 영화 상에서 알려주지 않으므로 서울의 고급 주택 촌인 평창동이라고 가정하고 박사장네 집의 시세를 알아보았다. ‘기생충’의 제작 팀 인터뷰에 따르면 박사장 댁은 땅 평수는 600평에 건물 평수만 200평이 넘고, 가격은 정확히 10,600,312,320원으로 100억을 훌쩍 넘긴다고 한다. 기우의 연봉은 어떨까. 영화가 상영되었던 2019년 기준으로 ‘임금직무정보시스템’의 통계 자료에 따르면 기우와 같은 처지인 소위 ‘고졸’들의 평균 연봉은 3000만원이 조금 넘는다. 3000만원과 100억원,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 가능한 차이일까?
영화 ‘기생충’ 속에서는 총 3가지의 가족들이 등장하는데, 이 중 박사장 댁은 극상류층에 속한다. 기택네 가족은 자신들과 박사장네 댁이 일종의 ‘공생 관계’라고 생각한다. 자신들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들은 그에 맞는 급여를 제공한다고 믿는다. 그러다 그들은 진정한 ‘기생’을 하는 문광네를 발견한다. 문광네 역시 기택네 가족을 ‘가족 사기단’이라 칭하며, 스스로를 정당화 하던 기택네를 ‘기생충’ 취급한다. 많은 사람들이 취업을 통해 자본가와 계약하고 공생 관계라고 믿는다. 그 관계를 위해 우리는 대학에 가려하고 자격증을 따내려고 아등바등 살아간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공생이고 기생일까? 무릇 공생이라면 적어도 일방적인 관계여선 안된다. 자본가가 제시한 ‘선’을 지키지 않아 금새 대체된 문광네를 숙주와 공생했다고 볼 수는 없다. 영화를 보며 나는 이 부분에서 씁쓸함을 느꼈다. 문광네와 우리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었고, 기택네처럼 합리화하며 사는 건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왜 이와 같이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 간의 극단적인 위계가 마치 하나의 신분제처럼 고정된 것일까? 주된 원인으로 외환위기 속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도입을 빼놓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핵심은 노동의 유연화와 시장의 개방에 따른 내수 시장 억압, 그리고 정부 개입의 최소화이다. 말이 유연화이지 노동자들에겐 사실 고용 불안정에 가까웠고 , 이로 인해 빈부격차와 불평등은 심화되었다. 또, 정부가 구조조정에 앞장서면서 사기업도 그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이는 노동조합은 배제한 채 자본 측의 일방적인 추진 아래 오직 그들의 선택과 노동 계급의 희생만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상황 속, 노동 계급은 투쟁할 의지마저 상실했고, “잘리기 전에 실컷 벌어나 놓자”라는 이른바 ‘도구주의적’ 태도를 취하게 됐다. 임금, 오직 그것만 고려하며 묵묵히 일만 하던 노동자 계급은 스스로 슈퍼 ‘을’이 되었고, 자연스레 자본 계급은 슈퍼 ‘갑’이 되었다. 이는 기택이 무기력한 가장이 되어버리고, 근세가 ‘기생충’으로 전락한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94년도, 경제 황금기 시절 그들은 자본가가 되고자 대만 카스테라 집 등 다양한 사업을 해왔었다. 하지만 그들은 황금기 시대를 맛본 동시에 IMF의 직격탄 또한 맞은 세대이다. 억압된 내수 시장의 결과가 부른 성장력 약화로 건드는 족족 망해가며 쌓이는 빚을 보았겠지. 그 빚을 보며 감히 재개할 의욕을 가질 수는 없었겠지.
IMF로부터 시간이 꽤 흐른 지금,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현재까지도 시민들의 계층 이동에 대한 인식은 비관적이다. 통계청의 자료에 의하면 오직 국민의 21%만이 노력하면 계층 이동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젊은 세대일수록 이를 부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국민의 60%가 “하면 된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한국 경제의 전성기, 94년도와 비교해보면 더욱 더 극명하다. 서울의 한 중학교의 모 교사는 “과거에는 부모의 가난을 원망하는 상담 내용이 많았지만 지금은 아예 없다.”고 답했다. 일찌감치 부모의 재력에 따라 갈 수 있는 학원이나 학교가 나뉘니 아이들은 무기력증에 젖게 되고, 문제의식 자체를 갖지 못한다. 요즘 가난은 상담 주제조차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관론의 확산은 “격차 고정사회”가 현실화될 위험을 경고한다. 그런데 이미 현실화된 것은 아닐까? OECD의 발표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저소득층에서 중산층으로의 이동은 평균 5세대가 걸린다고 한다. 계급 상승의 사다리가 부러져 버린 것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기우의 주제곡인 “소주 한잔”이 재생된다. 봉준호 감독은 이 노래의 원래 제목이 “564년”이었다고 밝혔다. 기우의 월급으로 그 대궐 같은 저택을 사기 위해 걸리는 시간이다. 단, 기우가 한 푼도 안 쓰고 집 값도 오르지 않는다는 전제에 한해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기우는 반지하에서 자신이 쓴 편지를 다시 읽으며 쓴 웃음을 짓는다. 아마 기우도 이루지 못할 꿈인 것을 알았던 것이 아닐까? 영화를 감상한 관객들은 왠지 모를 찝찝함과 쓸쓸함을 느낀다. 박사장네보다도 기우네에 감정 이입을 하게 되고, 형식 상 열린 결말이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기우마저도 이 영화의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옛날 말일까? 이 지독한 신분제를 타파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기생충’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걸까? 기택은 그 지하실에서 564년을 버텨야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