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복수는 나의 것> 속의 에노키즈와 오이디푸스 왕
대한민국의 인문학자 도정일 교수는 “20세기는 단연 오이디푸스의 시대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1]
도정일 교수님의 말에 동의하며 20세기 일본의 영화감독, 이마무라 쇼헤이의 대표작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오이디푸스를 찾아보았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밝힌 바와 같이, 치밀한 구성, 긴장의 상승, 인식과 발견이라는 완벽한 극적 장치를 갖춘 현재까지도 가장 위대한 비극이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2] 이렇게 사랑받는 작품인 만큼 패러디 작품 또한 매우 많은데, 대부분 노골적으로 작품 속에 어머니를 향한 이성애적 욕망과 아버지를 향한 적개심으로 오이디푸스적 요소[3]를 드러낸다. 그렇지만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은근하게 오이디푸스가 내재되어 있다.
영화는 이미 체포된 연쇄살인마 주인공 에노키즈가 취조당하는 장면을 시작으로 그가 회고하듯이 흘러간다. 어린시절 에노키즈는 가톨릭 신자이자 어부인 아버지 시즈오가 일본군의 기독교 박해로 배를 부당하게 뺏겼음에도 저항 하나 못하고 비굴하게 용서나 비는 모습을 보고 반항아가 된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방황을 결혼으로 막아보고자 맞선을 주선했지만, 맞선 당일 날 에노키즈는 덜컥 임신한 여자친구 카즈코를 데려왔고, 둘은 결혼하게 된다. 결혼 후에도 에노키즈는 방황을 일삼으며 결국엔 사기죄로 기소되었고, 아이들과 시아버지만 남은 카즈코는 시즈오에게 연정을 품게 된다. 시즈오 또한 그녀에게 이성적 매력을 느끼지만 가톨릭 신자이기에, 둘은 아슬아슬하게 근친상간의 선을 탄다. 한편 에노키즈는 교수와 변호사를 사칭하여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며 도망생활을 전전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여관 주인 하루를 만나 진정한 사랑에 빠지지만, 이미 망가진 그는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까지 결국 살해하며 끝내 체포당한다. 그는 사형을 선고받고, 카즈코와 시즈오는 그의 유골을 허공에 뿌리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오이디푸스왕에 대해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는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과 근친상간의 죄,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무지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이 세 가지 키워드를 주로 삼아 영화를 전개하되, 오이디푸스와는 차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먼저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이다. 오이디푸스의 무의식적 선택이든 아니든, 그는 그의 아버지 라이오스왕을 적개심으로 살해한다. 에노키즈 또한 아버지 시즈오에 대한 적개심으로 똘똘 뭉친 캐릭터이다. 다만 오이디푸스와 다른 점은 에노키즈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인식했다는 점이다. 가부장적인 가장의 표본이었던 아버지가 부당한 대우에 무력하게 무릎을 꿇는 모습은 에노키즈에게 평생의 적개심으로 자리 잡았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그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면 에노키즈에게 그 모습은 그리 큰 충격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졌다”라는 대사에서 그가 아버지에게 느낀 실망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어머니를 쟁취하기 위해 아버지를 적대 대상으로 삼다 아버지가 자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적절한 예시이다.
다음으로 근친상간의 죄이다. 마찬가지로 오이디푸스가 인지했든 하지 않았든, 그는 그의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근친상간의 죄를 저지른다. 에서도 근친상간이 나타나는데,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가 아닌 시아버지 시즈오와 며느리 카즈코의 관계에서 나타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그렇지만 에노키즈가 유독 어머니에게만큼은 지극했다는 점과, 자신의 아내와의 부정을 추궁하는 에노키즈에게 시즈오가 “네 피는 내 피이기도 해. 그리고 내 피에는 악마의 피가 흐르고 있지”라며 반문한 점에서 에노키즈 또한 그의 어머니에게 품었던 근친상간의 본능을 유추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스스로에 대한 무지이다. 오이디푸스왕의 비극은 그 스스로에 대한 무지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에노키즈는 왜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를 즐기지도 않으면서 셀 수 없는 사람을 죽였는가. 그는 그의 분노와 상실감이 아버지로부터 비롯됨을 알지 못해 평생 신경증을 앓았다. 그래서 그는 이유조차 알 수 없는 분노의 해소 방법으로 살인을 선택한 것이다. 그럼에도 끝내 그 원인을 알아내지 못한 에노키즈는 그의 사형이 집행되기 전, 아버지와의 마지막 조우에서 깨닫는다. “정작 죽였어야 될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어”라면서 말이다.
지금까지 두 작품을 주인공의 개인적인 측면에서 비교했다면 이번엔 사회적인 측면에서 비교할 차례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지만 끝내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리스적 세계관에서 ‘운명’은 ‘신탁’의 또 다른 말로 정의되는데, 이 신탁은 사실상 그 시대를 살아간 집단의 요구라고 볼 수도 있다. 근대 이후에 이것은 국가나 사회로 구체화된다. [4] <복수는 나의 것>의 시대적 배경은 일본의 전쟁 전후이다. 주인공 에노키즈는 직접 전시상황을 겪진 않았지만, 방관자의 입장으로서 패전의 기억은 갖고 있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이다. 당시 제국주의와 가부장제가 지배적이었던 일본의 사회상을 거부하지만, 끝내 그것을 거부하지 못하는 에노키즈는 오이디푸스와 닮아 있다. 이러한 점은 그의 마지막 살인인 “하마마츠 살인사건”에서 나타난다. 그는 앞서 저지른 살인에서는 설령 그의 가까웠던 지인이었다 할지라도 단 한 번의 죄책감을 가진 적이 없다. 이런 모습을 본다면 그가 단순히 어느 시대에나 있는 정신병자라고 치부할법도 하다. 그러나 “하마마츠 살인사건”에서 살해당한 하루가 재일조선인이라는 점과, 이것이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죄책감을 느낀 살인이라는 점에 주목한다면, 그가 전쟁의 상흔이 낳은 병폐라는 것을 감독이 의도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는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모습과 나약함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그는 그의 아내에게 누구보다 가부장적이었고 자신보다 힘이 약한 여성들만 살인 대상으로 삼는 나약함을 보여줬다.
오이디푸스와 에노키즈는 자신들의 비극을 풀어나가는 과정도 닮아 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는 죽음보다는 삶을 택한다. 이것은 운명에 굴복하는 모습이라고 보일 수도 있으나, 역설적이게도 운명에 저항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예를 들어 신들의 분노를 산 죄로 시시포스는 큰 돌을 가파른 언덕 위로 굴리는 벌을 받았다. [5] 그 돌은 정상에 올리면 다시 밑으로 굴러 내려가 처음부터 다시 돌을 굴려야 하는 끝이 없는 형벌이다. 시시포스는 신들에게 면죄부를 위해 빌거나 죽음으로 회피하지 않고 그 벌을 온전히 감내한다. 고대사회에서 신들이 갖는 절대성에 비추어보면, 신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반항은 그들이 준 죄를 보란 듯이 짊어지는 것일 것이다. 오이디푸스 또한 그의 죄를 온전히 짊어지고 살아간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반항이다. 에노키즈는 그보다는 좀 더 노골적으로 반항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는 아버지로 상징되는 사회의 모든 금기를 어기며 살아가다 숨을 거둔다. 그의 유골을 뿌리는 아버지의 손에 대해 거부하듯, 그의 유골은 밑으로 떨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떠 있는다. 아버지에 대한 그의 분노가 죽어서도 끝나지 않음을 내포한다.
고전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이나 예술 작품’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의 중요한 문화적 자산인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전 자체의 내용이 흥미롭다고 느끼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상이 변하며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전은 끊임없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독자들의 비판적 해석과 새로운 관점이 추가되어야 잊히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은 소중한 우리의 문화적 자산인 고전 오이디푸스 왕>을 뻔하지 않게 상기시켜 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또 이제는 과거의 작품이 된 복수는 나의 것>을 통해 현재의 관점에서 제국주의와 가부장제, 그리고 고대 사회의 운명론적 사고의 폐해에 대해 반성해 보는 계기가 되어 주기도 한다.
4. 참고
조유선, “3주 차 오이디푸스 왕”, 국민대학교, 2022.10.07
[1] 조유선, “3주 차 오이디푸스 왕”, 국민대학교, 2022.10.07
[2]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위키백과
[3] 오이디푸스 왕, 문화포털 예술지식백과
[4] 조유선, “3주 차 오이디푸스 왕”, 국민대학교, 2022.10.07
[5] 시시포스,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