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서의 윤리 개입 -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살인마 잭의 집>
“옛 성당엔 신만이 볼 수 있는 예술품들이 숨겨져 있고, 그 뒤엔 위대한 건축가가 있죠, 살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인을 예술이라고 믿는 광기에 사로잡힌 자칭 Mr. Sophistication, 주인공 교양살인마 잭의 첫 대사이다. 주인공 잭은 그를 지옥으로 이끄는 안내자 버지와 동행하며 자신이 12년에 걸쳐 저지른 무수한 살인 사건들 중 가장 중요한 다섯가지의 살인 사건에 대해 고백한다. 이 과정에서 잭은 무수히 많은 예술가와 작품을 차용하고, 히틀러와 무솔리니, 그리고 스탈린 같은 독재자까지 끌어들여 철학적 궤변을 늘어놓아 듣는 이들의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 살인이 예술이 될 수 있는가, 즉 예술에 도덕과 윤리가 개입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버지와 잭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다. 잭은 비록 살인과 시체의 부패일지라도 인간이 행하는 어떤 행위든지 예술로 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버지는 단호하게 사랑이 없는 예술은 예술이 아니라며 그의 주장을 단호히 반박하고,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 잭을 떨어트리며 영화는 끝이 난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살인마 잭의 집>은 영화계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감독의 화제의 문제작이다. 이 영화가 상영이 되었을 당시,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로 인해 도마 위에 올랐다. 첫번째로 영화가 지나치게 폭력과 사디즘에 치우쳐져 있다는 점이다. 영화에는 매우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폭력, 고문 및 살인 장면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러한 폭력성 때문에 칸 국제 영화제에서의 상영식에서는 관객 100여명이 도중 퇴장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동안의 연쇄살인마 영화의 주인공들은 나름의 “선”을 지켜왔었다. 어떤 적당한 사연을 가지고 있어 관객들에게 살인의 이유에 대한 조금의 이해를 내어준다든가, 살인하는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감독과 주인공은 그러한 관객들의 믿음을 철저히 배신한다. 주인공 잭은 매력적인 모습이 전혀 없을 뿐더러 어떠한 계기가 있어 살인마가 된 게 아닌 순수한 싸이코패스로 태어났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그에 대한 조금의 공감도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살인의 방법 자체도 엽기적인데 감독은 모자이크를 쳐주지도, 시선을 돌려주지도 않아 관객들은 어디서도 경험해본 적 없는 역겨움을 느끼게 된다. 특히 아동 살해 장면이 아주 잔혹하고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큰 논란이 되었다.
두번째로 문제가 되는 점은 감독이 보여주는 연쇄살인마에 대한 공감이다. 이 영화는 잭의 시각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며, 때로는 관객이 그 관점을 공감하거나 이해하도록 감독이 초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가 주인공 잭을 만들 때 참고한 영화 <잭 더 리퍼>의 실존인물은 살인에 있어 예술성을 찾지 않았다. 그렇다면 살인을 예술로 생각하는 것은 감독 본인의 사상일 가능성이 높다. 또,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하나같이 지독히 염세적인 영화만을 고집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그는, 주로 고통, 절망, 죽음을 소재로 극단적으로 우울한 영화들을 만들어내는데, 파괴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을 예술로 취한다는 점에서 감독과 주인공 잭이 비슷한 부류라고 생각이 들게 한다. 주인공과 감독에게서 비슷함을 느낀 관객들은 그들을 동일시하여 실제인물인 감독에게 그 도덕적 책임을 묻는 것이다.
세번째로는 악용과 충격적인 가치 전달이다. 일부 관객과 평론가들은 이 영화가 폭력과 충격적인 가치를 화두로 올리고 근본적인 도덕을 제공하지 않은 채 순전히 선동을 위해 이용한다고 비판한다. 감독은 잭의 독백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려는 시도였다고 설명하지만, 형식의 충격적임이 문제가 되어 본질이 가려지는 영화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
“살인이 예술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에 감독은 이미 그런 잭의 말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감독의 이 발언이 또 한번 논란을 일으켰지만, 실제로 우리는 이미 살인을 예술로서 즐기고 있다. 전설적인 킬러영화 <존윅>의 주인공 존윅이 영화에서 수십명의 사람을 얼마나 멋지게 상대하는지, 그가 연필과 같은 생활도구를 이용해서 사람을 죽일 때, 그 살인의 창의성과 기발함에 관객들은 열광한다. 이미 살인 행위들 속에서 예술적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영화들과 현실의 차이는 죽는 사람들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 뿐, 행위 자체는 똑같은데, 진짜냐 가짜냐의 여부가 예술성의 기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살인이 예술로 용인되지 않는 이유는 도덕성 때문인데, 도덕성과 예술성은 전혀 다른 별개의 범주이다. 어떤 행위에 예술성이나 창의성이 있다 하더라도 끔찍하게 비도덕적일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술성이 있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면죄부가 생기지 않는 것이며, 살인예술따위가 용인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와 감독은 끔찍하게 비도덕적인 행위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파고 들어 예술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 본질적인 가치를 의심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 감독은 왜 이렇게까지 끔찍한 예술을 하는가? 예술가들의 도덕적 자유를 인정한다는 입장에서도 영화를 보는 내내 역겨움이 가시질 않을 지경이었다. 뛰어난 미장센과 시적인 대사와 같이 예술로써의 조건이 잘 갖춰져 있다고 해도 사랑이나 평화와 같이 아름다운 것들을 놔두고 굳이 이런 끔찍한 세상의 모습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자꾸 내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에서 잭은 강박증이 심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는 살인을 저지를 때 마다 그의 강박증이 해소되는 것을 느낀다. 감독인 라스 폰 트리에도 병적인 강박증과 불안장애를 앓았는데, 이러한 잭의 심리적 변화는 끔찍한 것을 예술로서 배출시킬 때 감독에게도 일종의 심리 치료적인 효과로 도움을 받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다면 이런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받을 충격을 감독이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 치유효과를 보기 위해 작품을 통해서 자신의 고통을 관객들에게 떠넘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전이를 고통으로 받아들일지 예술로써 받아들일지는 온전히 관객의 몫이다. 예술가로서 감독의 역할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근본적인 도덕까지 제시하는 것 까지가 아니다. 예술은 다양한 형태와 주제로 이루어져 있으며, 예술가들은 어려운 주제와 논란스러운 주제들을 탐구할 권리를 가진다. 물론 예술가가 짊어진 사회적 책임은 존재하지만, 어디 까지가 예술가들의 몫이고 어디 까지가 관객의 몫인지는 각자에게 달린다. 윤리적으로 도전적인 작품은 그에 대한 새로운 고민을 유발한다. 실제로 이 작품이 논란거리가 된 것 자체가 사회에 새로운 도덕적 논의를 마련한 것이고, 이는 개인과 사회가 더 깊은 사고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에 이 영화의 예술성은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