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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사랑에 관하여

라빠르망과 한여름 밤의 꿈 속의 사랑들

by JISU

질 미모니 <라빠르망>, 1997


0. 뒤틀린 사랑에 관하여


“To love is to receive a glimpse of heaven.” 미국의 극작가 카렌 선드가 남긴 말이다. 사랑하는 것은 천국을 살짝 엿보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대게 아름답고, 영원히 가슴 속에 간직하고 싶은 숭고한 것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사랑에 관한 모든 기억들이 다 아름다운 것일까? 사랑은 삶의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비참한 곳으로 추락시키기도 한다. 여기 이와 같은 사랑의 이중적인 면에 주목하는 작품이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과 질 미모니 감독의 프랑스 영화 <라빠르망>이다. 이들이 그려내는 사랑의 모습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것과 달리 어딘가 뒤틀려 있다.



1. 한여름 밤의 꿈과 라빠르망, 사랑의 가장 단맛과 쓴맛


“나는 어젯밤 참으로 기이한 꿈을 꿨어. 그것은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지 못할거야” 라는 보텀의 말은 『한여름 밤의 꿈』이 사랑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지 함축한다. 작품에서의 사랑은 이해할 수 없는 환상으로 나타난다. 허미아와 라이샌더는 “다른 무엇이 선택한 사랑보다는 자신들의 이성으로 판단한 대상만을 사랑할 것” 을 맹세한다. 그러나 이들의 영원할 것만 같았던 사랑은 오베론에 의해 우습게도 단 하룻밤만에 무너지고 만다. 허미아를 열렬히 사랑했던 드미트리우스도 요정의 장난 한번에 그토록 싫어하던 헬레나를 사랑하게 되고, 이 둘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작품 속에서는 마법이라는 장치를 빌렸지만, 현실에서는 마법의 꽃즙 없이도 이런 일이 일어나곤 한다. 우리는 현재의 사랑이 영원할 것이고 충분히 이성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법의 꽃즙,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멈추면 내가 왜 그 사람을 사랑했나 싶을 정도로 아득한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다. 이런 사랑의 속성을 대문호인 셰익스피어조차도 요정, 마법이라는 존재에 기대지 않고서는 드미트리우스나 라이샌더의 변심을 설명할 수 없었던 것 아닐까. 이에 덧붙여 사랑의 꽃즙은 상대방이 누구인지 따지는 냉철한 이성과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다. 셰익스피어는 사랑이란 바로 이렇게 합리성이 결여된 자신만의 환상, 착각인 점을 강조한다.

『한여름 밤의 꿈』이 사랑의 허무함을 몽환적이고 유쾌하게 그려내 사랑의 가장 단맛을 보여줬다면, 라빠르망>에서는 좀 더 현실적이고 비극적으로 사랑의 가장 쓴맛을 보여준다. 제목인 L’Appartement 은 프랑스어로 아파트라는 뜻인데, 영화는 이 곳을 주된 배경으로 삼는다. 『한여름 밤의 꿈』의 주 배경이 숲이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이와 비교되어 더 삭막하고 차가운 느낌이 든다. 영화의 주인공인 막스에게 리자와의 끝맺지 못한 사랑은 그에게 하나의 환상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는 그 환상을 좇아가는 과정에서 또 다른 환상인 알리스와 만나게 되고, 그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현실인 뮤리엘의 곁으로 돌아간다. 막스의 이런 선택은 마치 끈적한 한여름 밤의 꿈 속에서 방황하다 깬 모습이 떠오른다. 이 영화에서의 사랑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이질적이다. 막스는 약혼자를 두고 전 연인을 잊지 못해 그녀를 속인다. 알리스는 사랑을 위해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를 배신한다. 리자는 유부남 다니엘과 불륜을 저지르고, 그는 그녀를 위해 부인을 살해한다. 이 기행들이 전부 자신들의 사랑으로 인해 비롯되었고, 그 끝엔 환상만 남았다니, 허무하지 않을 수 없다. 막스는 뮤리엘에게 돌아가고, 리자는 죽고마는 영화의 결말은 더 허무하다. 그러나 이 허망함과 예측할 수 없는 자유로움이 오히려 이 영화가 주목하고자 하는 사랑의 모습과 닮아 있다.



2. 알리스와 헬레나


비슷한 사랑의 모습을 그려냈기 때문일까, 『한여름 밤의 꿈』의 주인공들은 라빠르망>의 주인공들을 떠올리게 한다. 알리스의 사랑은 오직 거짓 속에서만 실현된다. 알리스가 리자의 흉내를 내고 있을 때만 막스의 사랑을 받고, 알리스가 막스를 모르는 사람으로 대할 때만 뤼시앵의 사랑을 받는다. 알리스의 이런 거짓된 사랑은 요정의 마법으로 두 남자의 사랑을 받은 헬레나와 닮아 있다. 영화의 작가도 알리스의 캐릭터에 대한 힌트를 주듯, 작 중 그녀는 『한여름 밤의 꿈』의 헬레나 역할을 맡는다. 또, 그녀들은 극 속의 완벽한 히로인인 헤르미아와 리자를 질투한다. 다만 그 양상이 조금 다른데, 헬레나는 이런 말을 한다.


아테네에서는 나도
그 애 만큼은 예쁘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게 뭐?
드미트리우스의 생각은 다른데.
누구나 다 아는 걸 그이만 몰라주고 있어.
그가 헤르미아에게 끌려 넋을 잃고 있듯이,
난 그이의 장점만을 동경하고 있나봐.
(헬레나, 1막 1장)


헬레나는 오직 드미트리우스로 인해 헤르미아를 시기한다. 한편, 알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오직 너만이 아름답구나.
그가 널 사랑하니까.
별 보다 더 반짝이는 네 눈을 증오해.
종달새보다 더 황홀한 네 목소리를 증오해.
네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다면
내 모든 걸 바치겠어.
네가 숨 쉬는 공기로 날 가득 채우고
네 목소리를 내 것으로 만들겠어.
네 눈빛을 네 모든 미모를!


독기 어린 알리스의 절규 너머로 리자에 대한 동경이 엿보인다. 리자를 시기하는 동시에 바라기에, 완벽히 그녀가 되기 위한 수단으로 막스를 갖고 싶어하는 것 같다. 영화는 막스와 알리스의 정열적인 장면들을 앞세워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알리스는 오히려 리자 자체를 원한다. 알리스는 모두의 사랑을 받는 리자의 재능과 미모를 탐내 그녀처럼 머리를 기르고 연극 배우가 된다. 리자와 막스가 헤어진 후에도 알리스는 리자의 곁에 남아 있으며, 리자의 연기 장면을 녹화해주는 알리스의 모습은 흡사 연인 같아 보인다. 물론 리자를 만나기 전에 이미 막스에게 반했었다고는 하지만, 과연 막스가 리자의 연인이 아니었다면 알리스가 이토록 그를 원했을까? 알리스가 진정 바라는 것이 리자인지, 연인의 행복인지, 사랑해줄 누군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오롯이 막스만을 원하는 것 같진 않다.



3. 막스와 드미트리우스


맹목적으로 리자를 쫓는 막스는 요정의 장난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한여름 밤의 꿈』의 라이샌더와 드미트리우스를 떠올리게 한다. 막스가 진정 그리워했던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대게 이별을 겪고 나면 슬프기 마련이지만, 왠지 “실연에 아파하는 비련의 주인공 같은 내 모습” 을 즐기기도 한다. 영화를 보며 막스에게도 그런 모습이 보였다. 그는 과연 진심으로 “리자”를 원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완성하지 못한 사랑을 뒤쫓는 스스로를 원했던 것인지. 나는 후자가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면서 알리스가 자신이 리자라고 했을 때, 막스는 대체 왜 혼란스러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막스에게 리자는 하나의 인물이 아닌 언제나 환상이었기에, 명확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갑작스러워 보이는 막스의 선택도 이해가 된다. 막스는 알리스의 비밀을 알게 된 후 그녀에게 더 끌린 것으로 보인다. 사실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던 미스테리한 그녀.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가련하기도 하지. 그가 쫓을 환상으로 남기기에는 제격이다. 진정 리자를 원했다면 마지막 순간에 분명 그녀를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막스의 사랑은 완성되는 것이고, 더 이상 환상이 아닌 현실이 된다. 그는 결국 실체가 뚜렷해진 리자 대신, 또 다른 환상인 알리스를 택한다. 그리고 공항에서 또 한번 그는 스스로 그의 환상을 떠나 보낸다. 뮤리엘의 손을 잡고 돌아간 그가 그녀에게 정착할 수 있을까? 막스는 먼 훗날 또 다시 그의 환상인 알리스를 쫓을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분비되는 도파민은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점점 감소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는 도파민 중독자처럼 보인다. 사실 막스에게 누굴 사랑하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그저 감소되지 않을 도파민을 원하는 것 아닐까? 막스의 이런 모습은 요정의 꽃즙에 홀려 헤르미아를 사랑하다 헬레나를 사랑하게 된 드미트리우스와 닮았다. 드미트리우스도 사랑의 유효기간이 지나기 전, 처음에는 헬레나를 사랑했다. 결말 부분에서 드미트리우스가 자의가 아닌 타의로 헬레나를 사랑하게 된 것이 그에게는 비극같이 느껴졌지만, 사실 그에게도 역시 상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헤르미아와 맺어져도 사랑의 도파민이 끝나는 순간 그는 또 다른 헤르미아를 찾아 나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게 또 다시 헬레나가 됐을 뿐이고, 그에게는 마르지 않을 꽃즙이 보장된 셈이니 아무래도 좋다.



4. 주목할 만한 점


두 작품을 모두 감상하며 특히 주목한 점들이 있다. 먼저 <라빠르망>은 프랑스 영화 답게 영화 곳곳에 상징성이 짙은 장치들이 돋보였다.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첫 장면의 반지들이다. 영화는 느닷없이 막스가 보석상에서 반지를 고르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가게 주인은 막스에게 세가지 반지를 보여주며 특징을 설명한다. 하나는 기품있고 수수하나 비범한 매력을 가졌고, 다른 하나는 화려하고 날카로워 자칫 다칠 수 있는 관상용 제품이며, 마지막은 소박하지만 불빛에 비추면 별처럼 타오르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막스는 주인에게 답한다. “세 반지 모두 마음에 드네요.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막스가 보석상 주인에게 연락할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이미 영화의 결론이 났다. 막스는 바라볼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으나 끝내 진심으로 받아들이진 않을 것이라는 것. 막스에게는 세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모두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그녀, 리자. 기품있고 비범한 매력을 가진 첫번째 반지이다. 소박하지만 관심을 가지면 독특한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 세번째 반지, 그의 곁을 지키는 뮤리엘이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매력을 막스는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알리스는 그녀를 거짓으로 꾸며낸다. 거짓으로 꾸며낸 이유는 사랑과 관심을 받기 위해서다. 그녀는 위험한 관상용 반지다.

라빠르망의 매력적인 또 다른 장치는 바로 구두이다. 구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아무래도 신데렐라일 것이다. 신데렐라에서의 구두는 왕자가 그녀를 찾게 해줄 사랑의 조력자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구두는 균열을 폭발시킨다. 구두는 막스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고, 신데렐라인 척 하던 새언니 알리스를 좌절시킨다. 하지만 구두가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막스는 신데렐라를 찾아가지 않기 때문이고, 불쌍한 신데렐라 리자는 왕자님이 구하러 오지 않아 죽고 만다.

『한여름 밤의 꿈』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마지막 결혼식에서의 연극이다. 테세우스 공작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보텀이 준비한 연극은 <피라모스와 티스베> 이야기이다. 이 연극은 젊은 남녀가 첫눈에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지만 양가 부모의 반대 끝에 결국 안타까운 죽음으로 사랑을 증명한다는 내용이다. 이렇게만 들어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연상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비극적인 내용의 연극은 축복 받아야할 결혼식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셰익스피가 굳이 이 연극을 배치한 이유는 아마 그들이 지금은 행복한 결혼식을 올리고 있으나, 그 행복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냉소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 아닐까? 흔히 셰익스피어의 5대 희극 중 하나로 『한여름 밤의 꿈』을 꼽지만, 이런 점에서 과연 진정한 희극이 맞는지, 헤르미아와 라이샌더, 그리고 헬레나의 꽃즙이 마르게 된다면 그들은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또, 결혼식의 주인공인 테세우스 공작은 오히려 이 연극을 보고 크게 기뻐한다. 이런 모습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남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듯한, 이성적이지 않은 모습을 또 다시 보여준다. 알리스의 대사가 떠오른다. “너무 사랑할 때는 남의 상처도 보이지 않아요.”


5. 진정한 히로인


처음 영화를 볼 때 리자와 막스를 응원하며 그들이 만나기만을 기다렸고, 결말에선 화가 나기도 했다. <라빠르망>은 2004년 미국에서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라는 영화로 리메이크 되었는데, 원작의 찝찝함을 씻어내기 위해 한번 시청해봤다. 이 영화는 줄거리부터 사소한 물건들과 장면의 구성까지도 원작을 따르지만, 결국 알렉스(원작의 알리스)는 버림받고 리사(원작의 리자)와 매튜(원작의 막스)는 맺어진다. “어쨌든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식의 결말은 원작에 상처 받은 팬들에게 사소한 위로를 건낸다. 다만 건조했던 원작의 시니컬함이 시각에서 채 빠지지 못했던 까닭인지, 얼렁뚱땅한 해피엔딩이 실망스러웠다. 그 때 비로소 왜 라빠르망>을 리자 시점에서만 봤는지 후회가 됐다. 장애를 극복하고 사랑의 결실을 이뤄내는 연인의 이야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이다. 주인공들의 완벽한 해피엔딩을 위해서, 악역들에게는 그들의 사랑을 어지럽힌 죄로 권선징악의 이치에 맞게 비참한 카르마가 돌아온다. 하지만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큰 장애물이 있을까? 한 쪽의 사랑이 결실은 반대쪽 사랑의 끝을 의미한다. 희극의 뒷편에서, 악역들은 넘을 수 없는 장애물에 부딪힌 또 다른 낭만극의 주인공이 된다. 라빠르망>은 주인공들을 둘러싼 사랑받지 못한 이들의 시선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작품이다.

“너무 사랑할 때는 남의 상처도 보이지 않아요. 사랑받지 못한 여자의 잘못된 사랑이었어요. ” 모든 것이 들통난 순간, 알리스는 처음으로 꾸며내지 않은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지금도 과연 알리사가 “너무 사랑한”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뭐가 됐든 그녀는 분명 사랑을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녀의 미친(?)짓들을 설명할 수 없을 테니까. 알리스가 보여준 사랑은 그 동안 우리가 익숙해져 있던 사랑의 아름다운 모습들에 의문을 갖게 하며,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의 리사와 라빠르망>의 알리스, 둘 중 누가 사랑의 본질에 가깝고 누가 잘못된 사랑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이렇게 복잡한 생각이 들게 하는 알리스야 말로 라빠르망>이라는 비극의 진정한 히로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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