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청소력

by 이혜연
청소력

봄은 겨울이 깨끗이 다듬어둔 하얀 도화지 위에 마구마구 색을 터트리는 계절이다. 냉한 흰 바탕에 비단 같은 꽃잎들을 함박눈처럼 날리며 온 세상을 연분홍, 연노랑, 연녹색으로 수놓다가 한꺼번에 바람의 커튼을 드리운 채 여름을 펼쳐내곤 한다. 땅 위에서 고단한 사계를 보낸 생물들을 재우고 낮게 덮어둔 눈구름으로 겨울을 보내지 않았다면 이렇게 해사하게 맑은 빛으로 빛나는 봄도 오지 못했으리라.


괜히 까닭 없이 설레어 바깥으로 겉돌기만 하려고 해서 오늘은 작정하고 봄을 집으로 들이기로 했다. 사람이 사는 공간은 겨울 동안 이곳저곳 쌓여있는 것들만 많아졌다. 두꺼운 이불이 케이크처럼 쌓여있고, 한 번씩 입은 옷이 옷걸이 위로 함박눈처럼 두텁게 층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 집은 큰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그림책을 벗어나 조금씩 글밥 많은 책으로 갈아타고 있어서 아기 때 읽어줬던 그림책들을 처분하기로 했다. 한번, 두 번, 세 번.. 무려 7번의 책을 한 아름 안고 내려두었다. 뭔가 꽉 막힌 체증이 사라지듯 조금씩 공간이 생기자 가슴의 응어리가 내려가는 기분도 들었다. 두 시간 동안 어지러웠던 책도 종류별로 정리하고 아이들 방에 그림도 다시 걸었다. 새로운 세상을 들인 듯 상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정리를 하면서 우리의 기억도, 마음의 공간도 결국은 비워야 새로운 날들을 펼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무엇이 아닌 버리지 못한 것들을, 잊어야 했던 것들을 지울 수 있는 청소력이 있어야만 세상의 계절과 새로운 날들의 결실을 얻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봄날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그림이 있는 부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