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있는 그곳

by 이혜연
엄마가 있는 그곳


툇마루 가득 따스한 햇살이 들고

바람이 아름다운 향기를 머금은 곳


나를 잊은 엄마의 환한 웃음이

저 멀리 하늘 너머에서부터

느껴지는 날들


열이 나서 축 처진 나를 업고

낮게 기도하며

밤을 새우던 날들도 잊으셨겠지


추운 겨울날

확독에 밥을 갈아

다글다글 씹히는 인절미

생일 선물로 만들어주셨던 그날들도

모두 잊으셨겠지


여러 날, 여러 해가 지나고

거기, 멀리 계신 엄마는

이제 나를 잊고

훨훨 가벼운 걸음으로

그곳으로 가셨어도


아직 당신의 셋째 딸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날에도

속상해서 하소연하고 싶은 날에도

아이가 아파 덜컥 겁이 나는 날에도


먼데 있는 엄마를

부르고 불러봅니다


나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날은 유난히 높고 파란 하늘에 황금빛 논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날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눈부신 햇살에 감탄하며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산은 첩첩이 쌓여있었고 마을은 작은 뫼산밑에 웅크리고 있었다. 하교하는 길 양쪽엔 추수를 하느라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늦은 점심을 먹는지 논두렁에 점점이 앉아 농활기에 찰나의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학교에서부터 배고팠던 나는 걸어오면서 꼬르륵 소리가 날 정도로 배가 등가죽에 붙은 느낌이었다. 이럴 때, 어느 논두렁에서 누가 밥 먹고 가라고 불러주면 좋겠다 생각하며 둘레둘레 엄마를 찾았다. 멀리 점점이 보이는 사람들 틈에서도 나는 엄마를 알아볼 수 있었다. 찍어내듯 복슬거리는 아줌마들 머리 사이에서도 내 엄마는 눈에 쏙 들어왔다. 그런데 너른 들판 어디에도 엄마는 없었다. 분명 오늘 누구네 벼 베는 거 품앗이 간다고 아침에 서둘러 가셨는데 어디에도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배고팠는데 아쉬웠다. 그러다 문득 멀리 마을로 내려가는 길 근처에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엄마였다. 서둘러가는지 발걸음이 분주했다.

아!!

엄마는 언니 밥 먹이러 가는구나.

혼자 일어날 수도 앉을 수도 숟가락을 들지도 못하는 언니가 굶을까 봐 새벽부터 들판에서 일하던 엄마는 남들 밥 먹으며 논두렁에서 쉬고 있을 때 정신없이 들판을 가로질러 언니에게로 가고 있었다.


그날은 정말 파란 하늘과 그림 같은 흰구름, 이 세상 같지 않은 빛나는 황금들녘이 아름다웠던 날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속에서 세상에서 가장 슬픈 한 여자의 뒷모습을 봤다. 가장 아름다운 날 평생 잊지 못할 슬픈 뒷모습을 볼 수 있는 게 인생이었다.


지금 그녀는 나를 잊었을 것이다.

무겁던 짐을 모두 던지고 망각의 강을 넘었을 것이다.

파란 하늘에 들녘 가득 벼대신 아름다운 꽃을 가꾸며 좋아하던 찬송가를 흥얼거리고 있을 거라 나는 믿는다.

이전 04화그땐 그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