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랬지까치밥 남기고
간지께로 가지를 꺾어
톡 건디리면
툭 쏟아져버리는 홍시를
조심조심
하늘에서 거둬들였다
바구니 바구니
객지 나간 새끼들 주소가 적혔다
어느 놈은 자식을 봤고
어떤 놈은 아파 골골하고
또 한놈은 돈 좀 번다고
얼굴 볼 새가 없어도
내 새끼들
언제나 내 아기들
그 입에 세상에 둘도 없이 맛난 것 멕이려고
간지께 높이 들고
하늘에서 홍시를 거둔다
그땐 그랬었다
바야흐로 민족 대명절 추석이 다음 주로 다가왔다. 더위도 그대로, 일상도 어제와 비슷하지만 어김없이 식구들이 모두 모이는 날이 왔고 혼자 세월을 견디는지 하얗게 뒤덮은 흰머리를 감추려 염색을 해야 했다. 새벽에 일어나 그림을 그리고 미용실 문 열자마자 첫 손님으로 자리에 앉았다. 어렸을 때도 추석이나 명절에는 목욕도 하고 머리도 잘랐다.
국민학교 시절 내내 마당에서 보자기 둘러쓰고 앉아 마치 바가지를 머리에 씌우고 그대로 오려낸 것처럼 머리를 깎았다. 얼굴이 작은 편이었던 나는 귀밑머리 3센티가 미의 기준이 됐었다. 성격이 게을러 자발적으로 머리를 안 감으니 국민학교 1학년때는 자고 있는 내 머리를 엄마가 삭발해 버린 적도 있었다. 그야말로 자고 나니 세상이 바뀌고 하루아침에 동네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엄마는 부드럽고 자분한 성품이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테러를 내게 하신 것이다. 아침에 놀래서 울고불고했더니 도시락쌀 때 쓰던 보자기를 태연하게 머리에 묶어주시며 너무 이쁘다고 마른입에 거듭거듭 침을 바르며 칭찬을 해댔었다. 자식 하나 때문에 넷이나 되는 다른 자식들의 머리에 이가 득실거리는 것을 못 보셨던 엄마의 특단이었다. 남의 집 셋째 딸은 그렇게 이쁘다던데 우리 집 셋째 딸이었던 나는 그렇게 멋과는 상관없이 자랐었다.
내 기억에 처음으로 돈을 주고 머리를 잘랐던 건 6학년 때 아빠 따라 이발소에 갔던 때였던 것 같다. 드디어 뭘 좀 아는 분이 나를 책임져주시나 싶은 마음에 달끈달끈 뛰는 가슴에 소로록 까치발을 들고 이발소로 들어갔다. 이발소에서 나오면 샤랄라 공주가 되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이발사 아저씨는 설레는 내 마음도 몰라주고 커트도 아니고 단발도 아닌 요상한 머리 스퇄을 만들어 놓으셨다. 물론 원판 불변의 법칙에 따라 나는 공주도 뭣도 아닌 돈 주고 이상한 머리 스타일을 한 까무잡잡한 아이 그대로 생애 첫 경험을 해야 했다. 이발소 거울을 보며 실망한 나는 어버이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엄마는 돈 들여 깎은 이발소보다 더 완벽한 각으로 머리를 잘라주셨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비록 검은 솥뚜껑 같았을지라도 뚝심이 있고 각도 정확하게 맞았으니까.
한마디로 엣지있었다.
모든 것이 조금 부족했던 때에 자랐었다. 돈도, 아이의 심리도, 스타일 존중이라는 것도 다 사치였다. 어떻게 하면 7 식구에 아픈 자식 하나를 굶기지 않고 교육도 시키며 하루를 살아야 할지 그 궁리로 새벽부터 초승달이 기울 때까지 밭고랑을 메고 논에 피를 뽑았다. 논두렁 한 뼘 자리가 나면 그 손바닥만 한 틈바구니에도 대두를 쭈르륵 심었었다. 그 낮과 밤이, 아침 서리와 밤의 고됨이, 우리 밥상 위로 올라왔다. 쉬지 않고 몸을 움직여 농사를 짓는 고된 엄마, 아빠의 등을 보며 자랐다. 그 등의 그림자 무게가 머리 스타일이며 하찮은 내 마음 따위의 무게보다 항상 무거웠었다. 그땐 어린 마음에도 부모의 수고와 고됨을 느낄 수 있었는데 지금의 나는 그분들의 수고와 정성만큼 내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걸까. 나는 가끔 너무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낸다. 내 그림자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반성하는 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