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는 끊임없이, 읽는다

by 이혜연
나는 끊임없이, 읽는다

20대 중반에 강도를 맞고 밤이 무서워 자취방을 정리하고 벼룩시장에 나온 방 한 칸 세놓는다는 기사를 보고 찾아간 곳은 나보다 2살 어린 한의대생이 집주인인 빌라였다. 그 시기는 내 인생의 암흑기 중의 암흑기였는데 그때 가장 빛나는 구원의 손길이 거기에 있었다. 방 한가운데서 잠도 못 자고 해가 지면 마음도 함께 무너져내려 울기를 반복하던 시기에 그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3년 후, 그 집에서 나는 완전히 치유돼서 나왔다. 물론 그때도 나오려고 나온 게 아닌 우울증에 걸린 언니와 7살, 3살 조카들과 함께 살기 위해 그 친구 집에서 나와 전셋집을 얻었어야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 친구는 계속 내 주위에서 여러모로 많은 지지를 해주었다.


집주인이었던 친구는 한의대에서 밴드로 활동하기도 했고 여학생회장으로 여러 가지 일을 척척해내기도 했다. 말을 하는 법이 별로 없었고 가끔 집에서 쉴 때면 EBS수학을 보며 혼자 웃곤 했다. 고 3을 지나며 나는 수학의 수자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공식이란 공식은 모조리 잊어버렸으며 다시 수학책을 집어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나였기에 그 친구는 알 수 없는 존재였다. 한 번은 너무 신기해서 "수학이 그렇게 재밌어요?"하고 물으니 이 재밌는 걸 왜 모르냐는 듯 '응, 재밌어.'라고 말하며 다시 방송에 집중했다. 내겐 무심한 듯 따뜻하고, 편안하고, 위안이 되던 사람이었지만 수학이 재밌다는 말은 정말이지 와닿지 않았었다.


그런 내가 요즘 푹 빠져있는 유튜브 채널이 있는데 바로 '깨봉수학'이다. 3년 전 아이들 교육에 한참 관심이 있을 때 메타수학책을 읽으며 수학에 조금 눈이 떠질 때 기적처럼 조봉한 박사님의 깨봉수학을 알게 되었다. 수학은 계산하는 능력이 아니라 '무시'를 통해 핵심을 파악하고 일정한 규칙을 따라 패턴화 시켜 변화를 파악해 미래를 예측하고 사실이나 현상을 '관계'로 보고 연결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힘을 기를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배워온 무조건 암기해야 하는 수학이 아닌 만국공통어인 개념언어라는 말이 신선하게 다가왔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깨봉수학을 보며 내가 배웠던 수학을 지워내고 있다. 그러면서 예전에 수학을 보며 재미있어했던 그 친구가 계속 생각이 났다. 말은 없었지만 항상 행동으로 자신의 삶을 증명해 내는 사람이었던 그 친구가 좋아했던 수학을 오십을 넘어 다시 읽고 있는 중이다.


수학은 계산이 아니라 그림이며 언어라는 말이 요즘처럼 와닿는 때가 없다. 그리고 수학의 개념을 알게 되면 인간의 심리와 경제의 흐름을 위한 시나리오도 빠르게 습득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아이들에게 단순히 학교성적을 위한 공부를 시키고 싶지 않은 나는 요즘도 여행을 갈 때나 오랜 시간 차를 타야 할 때도 라디오나 음악을 틀지 않고 아이들과 대화를 하며 간다. 엊그제 마트에 가는데 큰애가 신용 카드는 종류가 많냐는 질문을 했다. 그래서 카드의 종류를 말해주기 전에 카드의 배경에 사람들 간의 믿음, 돈이 탄생된 배경, 그리고 신용이라는 개념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설명해 주었지만 아이가 이해했느냐는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직 덜 성숙한 나의 개념어들이 아이들에게 와닿을 정도로 또렷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그런 질문들을 받고 내 나름의 그림을 그릴 수 있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끊임없이 수학을 읽고, 과학을 상상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아줌마와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