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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by 이혜연
그래서 나는,

속단하고 싶을 때가 있다. 저것을 향해 뛰어가야 할 때, 그곳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인지에 대한 망설임과 너무 멀거나 높은 곳은 아직 여린 내게 불가능한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속삭이며 주저앉고 싶은 유혹에 시달린다.


지난주에 옮겨놓은 상추들이 모두 시들해서 이번 상추농사는 망쳤구나라고 생각했었다. 성경에는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하는데 어설픈 농군은 자기처럼 유약한 작물들을 생각하느라 새삼스레 날씨를 가늠하고 물때를 계획하고 있었다. 주말에 다녀온 후에 온다던 비는 3일 연속 내리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해는 점점 뜨거워지고 있어 옮겨 심은 고추가, 시들한 상추가, 너무 일찍 아욱잎을 딴 건 아닌지 걱정돼서 성급했던 자신을 안달복달했다. 그래서 오늘은 아침부터 서둘러 텃밭으로 달려갔다.


드넓은 밭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주인을 달리하고 있었다. 신기하게 모든 것들은 주인을 닮아간다. 땅도 마찬가지인지 주인의 특성에 맞게 자유분방한 밭, 일렬종대로 정돈된 밭들이 펼쳐져있었다. 첫사랑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텃밭이 보이는 100M 밖에서도 우리 밭이 환하고 또렷하게 보인다. 거기엔 지난 주말에 봤던 시들시들했던 상추 대신 풍성한 나의 아이들이 햇살에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일까. 비가 필요했다면 지난주에 더 많이 내렸고 보살핌이 필요했다면 지난주에 소중히 이사를 시켰었다. 그렇다면 내가 뿌린 씨앗들은 어떤 이유로 3일 만에 이렇게 아름답게 변신이 가능했던 걸까?


그들에게 필요했던 건 어쩌면 자신들을 믿어주고 기다려줄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씨를 뿌리자마자 커다란 자루를 채울 욕심으로 들떴던 설익은 내 기대와 좁디좁은 믿음이 스스로를 실망의 구렁텅이로 내몰았을지도 모르겠다. 섣부른 속단과 서투른 판단들은 그네들의 생장에 필요한 것들이 아니었다. 이건 잘못됐다는 포기도, 풍성한 열매를 딸 것이라는 때 이른 기대도, 나의 작은 도심 속 텃밭의 주인공들의 속도를 전혀 생각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들에겐 더 깊고 튼튼한 뿌리를 내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에겐 믿고 기다릴 수 있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한 발짝씩 다가가게 된 오월의 첫날, 상추와 시금치와 아욱은 하루하루 더 풍성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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