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은 붉게 피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의 노래, 붉게 물든 찔레꽃

by 운조

디지털 액정 위, 동기들의 활기찬 대화창 너머로 한 장의 사진이 스며들었다.

맑고 투명한, 한 점 티 없이 흰 찔레꽃.

섬세한 백색 꽃잎은 햇살의 조각들을 머금어 눈부셨고,

그 가운데 수줍게 자리한 노란 수술과 싱그러운 초록 잎새는

마치 세상의 모든 청결함을 한 송이에 압축해 놓은 듯 순결했다.

그러나 나의 시선은 그 순백의 아름다움에 머물지 못하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찔레꽃의 환영을 붙잡았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러나 어딘가 아련한 기억의 저편에 존재할 것만 같은 핏빛 찔레꽃.

애초에 찔레꽃은 붉게 물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눈처럼 흰 꽃잎을 피워 올리고, 시간이 흐르면 바스러지듯 갈색으로 말라 흙으로 돌아갈 뿐.

하지만 우리의 노래는, 우리의 시는,

사무치는 그리움처럼 붉게 타오르는 찔레꽃을 이야기한다.

그 붉음은 꽃잎의 색이 아닌, 마음의 가장 깊숙한 곳에 새겨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색깔이다.

귓가에 아버지의 오래된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1950년, 잿빛 연기가 휩쓸고 간 고향 땅을 등진 아버지.

이제 고향의 찔레꽃 향기는 희미해졌을지도 모르지만,

그 멜로디만은 아버지의 낡은 가슴속에 굳건히 뿌리내리고 있었다.

막걸리 몇 잔에 붉게 달아오른 밤이면,

아버지는 늘 그 애달픈 노래를 나지막이 읊조리셨다.

"찔레꽃 붉게 피는 북쪽 나라 내 고향…"

어린 나는 아버지 곁에서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때는 찔레꽃이 붉게 물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저 아버지의 목소리에 실린 선율을 따라 했을 뿐이다.

그 떨리는 음성 속에는, 푸르렀던 젊은 날의 아련한 향수가 배어 있었고,

덧없이 흘러간 세월의 쓸쓸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때의 나는, 아버지의 그 붉은 목소리가 단순한 회한이 아닌,

사무치는 그리움과 억눌린 슬픔이 뒤섞인, 깊고 어두운 색깔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저 낡은 노래 한 자락으로 흘려들었을 뿐.

이제야 비로소 안다.

아버지가 그토록 애절하게 노래하던 찔레꽃은,

눈부시게 하얗게 피어났다가,

아버지의 메마른 가슴 속에서만 핏빛으로 물들어가는,

슬픈 운명의 꽃이었다는 것을.

떠나온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붉은 색깔의 잉크처럼 스며들어 아버지의 심장을 물들였던 시간.

그 애틋한 시간이 바로, 아버지의 찔레꽃이 붉게 물들던,

고독하고 아픈 순간이었으리라.

오늘도 나는, 디지털 화면 속에서 피어난 순백의 찔레꽃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 하얀 꽃잎 위로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 속에서,

문득 아버지의 쓸쓸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고독하게 살아가셨던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그 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라 또 다른 타향에서 살아가는 나의 외로운 모습이 겹쳐진다.

찔레꽃의 순결한 흰색은, 우리 부녀가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의 깨끗한 기억이지만,

그 하얀 꽃잎 위에 덧없이 스며드는 붉은빛은,

북쪽 나라 언덕 위 초가삼간을 떠올리게 한다.

아버지는 언제나 '남쪽 나라' 대신 '북쪽 나라'라고 불렀다.

떠나온 고향이 휴전선 부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향은 가까이 있지만, 결코 갈 수 없는 땅이 되어버렸다.

북쪽 나라 언덕 위 초가삼간을 떠올리며

아버지는

눈물 어린 이별가를 나지막이 불렀다.

깊은 고독과 사무치는 그리움의 덧없는 흔적이다.

귓가에 아버지의 떨리던 노랫소리가 아련하게 되살아난다.

"찔레꽃 붉게 물드는"

그리고 문득, 아버지의 그 붉게 물든 목소리 속에서

나도 모르게 피어오르는 눈물이 있다.

이제 아버지의 찔레꽃은 더 이상 흰 꽃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히 붉게 물들어버린, 사무치는 기억의 꽃이 되어, 아버지와 나의 시간 속에서 피고 또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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